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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유세 현장…"우리는 7년간 동맹의 곁은 지키지 못 했다"

중앙일보

입력

지난 4일부터 9일까지의 6일 간 28곳의 아이오와 지역을 순회한 미국 공화당 테드 크루즈 경선후보의 '아이오와 버스 크루즈'. 총 이동거리만 1800㎞다.

유세 둘째 날인 5일 오전 눈으로 덮인 인구 2937명의 오나와시 마을 공립도서관에는 100여 명의 주민이 단출하게 모여 있었다. 크루즈의 유세 현장은 전날 갔던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 집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느슨했다. 검색대는 커녕 경호요원이 한 명도 없었다. 크루즈도 청바지에 청색 셔츠의 캐주얼 차림이었다. 그래서인지 도서관에 모인 주민들 표정도 편해 보였다. 1시간 가량의 집회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모두 행사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크루즈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주민들 틈에 섞여 있다 인사를 나눌 기회가 와 "당신을 취재하러 온 한국 기자"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크루즈는 두 손으로 기자 손을 덥석 잡았다. "한국 국민에 메시지를 달라"고 하자 그는 잠시 눈을 지긋이 감은 뒤 "우리는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한) 지난 7년 동안 우리 친구와 동맹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의 적에 맞서기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2017년 1월에 그게 바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게 북한을 뜻하는 거냐"고 되묻는 순간 바로 옆에 있던 캠프 관계자가 답을 가로막고 나섰다. 질문은 공식 채널을 거쳐야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떡이는 크루즈의 표정에선 자신이 내년 1월 새 대통령에 취임하면 북한에 강경하게 나설 것이란 뜻으로 한 발언임을 읽을 수 있었다.

175번 국도를 타고 120㎞를 북으로 달려 도착한 다음 유세장은 체로키시 국도변 '대니의 스포츠바'. 크루즈가 아이오와에서 허름한 시골 스포츠바에까지 발로 뛰는 강행군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트럼프보다 강경파'로 불리는 그로선 보수 색채가 유독 강한 아이오와가 생명 줄이다.

크루즈는 첫 승부처인 아이오와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 트럼프 대세론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0일 월스트리트저널의 아이오와 여론조사 결과 크루즈는 28%의 지지율로 트럼프(24%)에 앞서 있다.

매트 스펄링(33·목사)은 "난 원래 트럼프도 좋아하지만 좀 막 나가는 경향이 있어 백악관 주인이 되면 과연 헌법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며 "따라서 '헌법을 지키는 파이터'인 크루즈를 택하려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연설이 선동적이라면 크루즈의 연설은 논리적이었다.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온 수재답게 막힘이 없었다. 먼저 사회를 본 스티브 킹 하원의원(아이오와주)이 "나도 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크루즈에 비하면 똑똑한 축에도 못 낀다"며 분위기를 띄웠다.

크루즈의 연설은 3단계.

시작은 '내가 대통령에 취임한 내년 1월20일 당일에 할 일 5가지'다. ▶오바마 대통령의 총기 규제 행정명령을 무효화하고 ▶사법부로 하여금 낙태 찬성 단체를 수사하도록 명령하고 ▶공무원이 언제든 예배 볼 수 있게 하고 ▶이란 핵협상 합의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는 게 그것이다.

2단계는 '위대한 미국' 띄우기. "쿠바에서 태어나 자란 아버지는 쿠바혁명에 동참해 싸우다 옥에 갇혀 고문당했다. 코는 부러지고 이는 다 깨졌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느님은 아버지를 향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 나와 18살의 나이에 딱 10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시간당 50센트(약 600원)을 받으며 설거지 일을 하다 결국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됐다. 성경은 우리에게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늘 같다. 늘 나에게 말한다. '쿠바에서 억압받을 때 벼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고. 도망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위대한 미국이다'."

마지막은 '부탁 3가지'. ▶이 자리에서 2월1일 당원대회 멤버로 등록하고 ▶주변 친지 등 지지자 10명 포섭하기 ▶매일 1분씩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다. 연설의 마무리 또한 공화당 핵심 지지층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을 의식했다.

유세를 지켜 본 데니스 멕켄듀리스(54·주부)는 "무엇보다 그의 독실한 종교관에 마음에 들었다"고 흡족해했다. 갓난 아이를 안은 채 유세장을 찾은 수잔 콜린스(29)는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내 주변에는 크루즈와 트럼프 지지자가 정확히 양분돼 있었다"며 "그런데 최근 들어 크루즈 쪽으로 돌아서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다"고 귀띔했다.

이날 마지막 일정인 수시티의 기독교대학 도트대학에는 비교적 대규모인 500여 명이 모였다. 홀 1층이 꽉 차 2층 난간까지 청중으로 꼭 찼다. 저녁 시간이라 가족 단위와 젊은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행사장 곳곳에는 '용감한 보수주의자'란 팻말이 출렁거렸다.

'아이오와 크루즈 돌풍'에는 그가 '비주류'란 점이 크게 작용한 듯 했다. 그만큼 기성 공화당 주류 세력에 대한 불만이 축적돼 있음을 뜻했다. 이를 교묘히 활용하는 게 크루즈의 영리함이다. 크루즈의 유세 중 가장 큰 박수와 열렬한 환호를 받은 대목이다. "뉴욕타임스는 '크루즈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왜냐면 워싱턴의 엘리트들은 그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근데 이게 내 선거 캠페인의 핵심이 될 줄이야. 워싱턴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도 싫어했다. 워싱턴에 맞서는, 워싱턴이 가장 싫어하는 내가 그 뒤를 잇겠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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