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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미술] 대가는 많이 그리고 많이 실패한 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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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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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 미술평론가

겨울방학 시즌이 되면 대형 기획전이 많이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전(4월 10일까지)도 그런 전시의 하나다. 이 전시가 주목되는 것은 거장들의 작품을 선보일 뿐 아니라 유럽 문화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후·귀족 문화와 컬렉션 문화, 스튜디오·공방 문화, 그리고 시장의 발달에 따른 장르의 분화·발달 등 유럽 문화의 중요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육적 가치가 높은 전시라 하겠다.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전

 출품작은 모두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소장품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매우 작은 나라다.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사이에 있으며 인구는 3만7000명이다. 우리로 치면 읍 정도의 인구를 가진 나라인데 놀랍게도 박물관은 유럽 정상급의 궁정박물관이다.

 이는 리히텐슈타인의 대공들이 오랜 세월 열정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해 온 결과다. 전시의 도입부가 일러주듯 유럽의 쿤스트카머(Kunstkammer) 문화가 이 같은 수집열의 중요한 바탕이 됐다. 우리말로 ‘미술의 방’ 정도로 번역되는 쿤스트카머는 르네상스 이후 급속히 증대된 유럽 지도층의 지적 호기심을 반영하는 공간이다. 유럽의 제후·귀족들은 미술품뿐 아니라 문화인류학, 심지어 생물학의 범주로나 분류해야 할 온갖 진귀한 사물을 경쟁적으로 수집했다. 미술품도 감상의 대상을 넘어 먼 곳의 경관이나 오래 보존하기 어려운 사물, 종교와 신화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지식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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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의 부성애를 엿보게 하는 걸작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런 사물과 미술품 수집열은 관찰과 경험을 중시하는 문화와 결합돼 박물관·미술관을 낳았고, 유럽의 지성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향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리히텐슈타인 대공들 또한 이 부분에서 여느 유럽의 제후 못지않게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런 전시에서는 유럽인 특유의 유물적 탐구열과 수집열을 흠뻑 느껴보는 것도 좋은 감상법이다.

 이와 더불어 눈여겨볼 만한 이번 전시의 특징을 하나 더 꼽자면 바로크 거장 루벤스의 유화 스케치가 많이 출품됐다는 것이다. 그의 유화 스케치 용도는 이런 것이다. 루벤스는 제자를 많이 두고 ‘공장식 생산’을 했다. 그가 작은 유화 스케치를 제작해 넘기면 제자들이 이를 큰 작품으로 확대해 완성했다. 그는 이 과정을 감독했고 제자들 선에서 마무리해 팔거나 자신이 덧칠한 뒤 팔았다. 물론 시종일관 자기 손으로 그린 작품도 있었다. 이 세 종류의 작품은 판매가가 달랐고, 계약 당시부터 명확히 구분해 계약했다.

 루벤스는 프로페셔널리즘을 추구한 유럽 미술가 가운데서도 이렇듯 기업가 정신이 남달랐다. 이런 제작 방식은 그가 엄청나게 많은 주문을 받은 화가였음을 새삼 일깨워주는 한편 다작인 만큼 태작(?作)도, 걸작도 많은 작가라는 사실 또한 일깨워준다.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태작이 많은 화가가 걸작도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가는 많이 그리고 많이 실패한 화가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 약력: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저서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그리다, 너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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