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새해에 짚어보는 민주화Ⅱ의 행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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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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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험하고 어지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지난해에도 용하게 잘 버텨왔다는 생각이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시장경제의 불황이란 먹구름은 세계화된 지구촌 곳곳을 뒤덮고 있다. 그런 가운데 종교적 극단주의와 부족 간 갈등에 시달리는 중동이나 대규모 난민 유입과 테러 위협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유럽에 비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는 비교적 평온한 이웃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초강대국 간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중 관계, 동북아에서 역사의 유산에 묶여 있는 한·중·일 3국 관계, 지난해 말엔 경제공동체로까지 진전된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 관계 등은 한 가지로 경쟁과 협력이란 평화적 보완관계를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다. 오직 이러한 국제적 및 지역적 흐름에서 예외지대로 남지 않으려는 북한의 노력을 기대할 뿐이다.

 이런 와중에서 한국의 평화외교는 성공적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평가될 수 있다. 특히 지난해 불투명한 국제 정세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한 일련의 정상외교는 실리와 상징성 양면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정상외교는 지도자들 사이의 인간적 관계, 혹은 화학적 작용(chemistry)이 결과를 좌우하는 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연기되었다가 열린 오바마 대통령과의 워싱턴 회담,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안고서 참석하였던 중국 전승절 70주년 기념식 및 시진핑 주석과의 베이징회담, 다각적 외교 노력의 결과로 서울에서 3년 만에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취임 후 처음 가진 아베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은 각기 생산적 양자 관계는 물론 지역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다자협력 관계를 촉진하는 데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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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건실하며 이를 남북관계 개선으로 연계시킬 평화통일 전략의 추진 전망도 어둡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국가적 과제는 어떻게 성장의 동력을 촉진하면서 부의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을 줄여 가느냐는 경제민주화라 하겠다. 4대 개혁을 완수해 30년 성장 기반을 마련하자는 박 대통령의 신년사가 이를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4대 개혁보다 더 큰 과제인 정치개혁을 어찌할 것인가에 있다.

 냉전의 끝자락인 1987년 독재와 장기 집권에 항거한 민주화Ⅰ은 대통령 직선제와 단임제 개헌을 핵심으로 하였다. 이른바 87년체제는 국가 운영의 효율성보다는 국민 참여를 보장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김영삼과 김대중을 차례로 대통령에 당선시켰고 두 번의 여야 간 정권교체는 평화적 민주화의 성공 사례로 꼽힐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 참여의 대의기구인 정당과 국회의 건전한 제도화가 극도로 부진한 가운데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발전의 후유증으로 심화된 경제적 및 사회적 격차는 범국민적 위기감을 몰고 왔다.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가 여야를 넘어서 확실한 국가과제로 부상한 것은 당연하며 시의적절한 결과였다.

 지난 3년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에 전력투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경제민주화는 정치민주화보다 백배 어려운 과제이며, 순조롭게 작동하는 정치체제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민주화Ⅰ의 30년 실험이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30년의 발전을 기약하려면 한국 민주주의의 운영체제 정비는 결코 미룰 수 없는 선결과제라는 결론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민주화Ⅰ이 만든 단임제에 묶여 있는 박 대통령의 국정개혁 노력은 바둑의 초읽기와 같은 ‘시간과의 싸움’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4대 개혁에 집중하기 위해 개헌 논의의 잠정적 자제를 호소한 그의 입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새해를 맞으며 석 달 후 총선, 내년 대선이란 국가 운영 일정에 부딪치니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날로 그 효율성과 정당성이 떨어져가는 87년체제인 민주화Ⅰ을 다음 정권에 그대로, 더 나아가 앞으로 30년 국가 운영의 틀로 남겨둘 것인가.

 박 대통령의 어깨에는 숙명적으로 무거운 짐이 놓여 있는 것 같다. 어렵더라도 우리의 민주체제, 국가운영체제의 틀을 다시 점검할 국민적 논의를 열어 갈 시점에 서 있다고 하겠다. 민주화Ⅱ로의 전진을 위한 개헌 논의도 무작정 늦출 수만은 없다. 우리에게는 위기에 강한 DNA가 있다 하지 않는가. 우리라고 독일의 대연정과 같은 국가 운영 방식을 시도할 능력이 애초부터 없다고 단념할 필요는 없다.

 87년 민주화Ⅰ이 투쟁의 결과였다면 올해부터 시도되는 민주화Ⅱ는 타협과 공생의 윤리를 체질화하는 훨씬 어려운 산행이 될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