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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후보들 “현역의원만 느긋 … 머리 깎고 시위하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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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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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예비후보자 등록 후 선관위 직원이 선거사무원 명찰을 만들고 있다. 선관위는 선거구 획정이 지연돼도 예비후보들의 선거운동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뉴시스]

“500만원 들여 만든 현수막 떼려면 또 100만원 든다는데, 그 돈 아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국회 앞에서 머리 깎고 시위라도 하고 싶습니다.”

총선 100일 앞 선거구 결정 안 돼
어디서 어떻게 운동할 지 깜깜
내달 8일까지 선거구 획정 안 되면
후원회 열어 모은 돈 정당에 귀속
30일 여야 협상 테이블도 안 열려
일부 현역 “예비후보 현수막 떼야 …”

 강원도 원주갑 새누리당 예비후보인 박정하 전 청와대 대변인은 30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발표 직후 이렇게 말했다. 선관위는 이날 ‘선거구 부존재’ 사태가 내년 1월 1일 0시부터 현실화해도 예비후보들의 선거운동을 단속하지 않기로 했다.

 선거구 부존재란 국회가 새로운 선거구를 정하지 못해 기존 선거구가 모두 무효가 되는 사태다. 이렇게 선거구 없는 나라가 되면 예비후보들도 자격을 잃게 돼 그들의 선거운동은 선거법상 모두 불법이 된다. 수백만원을 들여 현수막을 걸어놓고, 그걸 떼느라 다시 돈을 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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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구 획정 법정시한(지난달 13일)을 훌쩍 넘긴 여야는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선거구 부존재 사태를 이틀 앞두고도 완전히 손을 놓았다. 30일 여야는 선거구 협상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국회 주변에선 “현역들은 불편할 게 없으니 도전자인 예비후보들이야 애가 타든 말든 느긋한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결국 선관위가 1월 8일까지 한시적으로 편법적인 ‘봐주기 방침’을 밝히면서 박 후보를 포함한 예비후보들은 선거운동은 계속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자신이 출마할 선거구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모른 채 지역을 누비는 ‘깜깜이 운동’을 해야 하는 현실엔 변함이 없다. 당장 원주갑만 해도 횡성군과 합구(合區)가 될 것이란 소문이 1년 넘게 무성한 상태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답답한 상황에 놓인 예비후보들은 전국에 781명이다. 선거구 획정이 안 되면서 특히 선거자금 문제를 호소하는 정치신인들이 늘고 있다.

 파주갑 더불어민주당 정진 예비후보는 “소액후원을 받아 깨끗한 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나를 도우려던 후원자들의 돈이 엉뚱한 곳에 쓰일 수 있어 후원회를 못 열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법상 예비후보도 후원회를 열 수 있지만 선관위가 다음달 8일 이후로도 선거구 획정이 안 되면 예비후보들의 활동을 정지시킬 수 있어 후원회를 두는 걸 망설인다는 설명이다. 예비후보 활동이 중단되면 후보들이 모아뒀던 후원금은 각 정당으로 귀속돼 버린다. 선거사무소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후보도 많다. 서울 성동갑 새누리당 예비후보인 진수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소문대로 성동갑·을이 단일 선거구가 되면 선거사무소를 지역 중심인 왕십리로 옮기려 하지만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선거구 획정이 아직 안 됐기 때문이다. 그는 “총선을 105일 남겨두고도 이런 고민을 해야 하다니 나도 의원 출신이지만 19대 국회는 해도 너무한다”고 했다.

 30일 서울 서초을에 새누리당 예비후보 사무소를 연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선거구조차 정하지 못하는 국회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이 팽배해 있다”며 “‘그런 국회에 왜 들어가려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얼굴 들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의왕-과천의 새누리당 예비후보 최형두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도 “어떤 분들은 ‘당신 뽑아주면 엉터리 국회의원 숫자를 절반으로 줄여줄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지역구 출마를 결심한 한 현직 비례대표 의원실 관계자는 “예비후보들의 선거운동을 선관위가 법대로 막았어야 현수막도 내리고 명함도 못 돌리는 건데…”라고 아쉬워했다. 비례대표 의원은 전국 어디서든 의정보고 명목으로 홍보물을 뿌릴 수 있다.

남궁욱·강태화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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