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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레터] 새하얀 눈은 추억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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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고 김영갑이 촬영한 남이섬의 겨울 풍경.[사진 남이섬]

올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합니다. 일기예보가 늘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눈이 적게 내린다는 예보보다 기분은 좋습니다.

여행 기자는 겨울이 오면 눈을 기다립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눈이 내린다고 하면 당장 뛰쳐나갑니다. 눈이야말로 겨울 최고의 콘텐트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니 눈과 얽힌 추억이 수두룩합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눈밭에서는 가슴까지 파묻히기도 했고, 캐나다의 북극 도시 옐로나이프에서는 개 썰매를 타고 설원을 질주하기도 했지요.

눈이 늘 고마웠던 건 아닙니다. 눈 내린 한라산을 오르기로 작정한 적이 있었지요. 마침 제주도에 눈 소식이 있어 부리나케 내려갔었지요. 그러나 끝내 한라산을 오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예보가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눈이 내리긴 내렸지요. 그러나 너무 많이 내렸지요. 한라산은 일주일이나 출입이 통제되었습니다.

눈이 오면 갈 데도 많고, 할 일도 많습니다. 눈 내리는 절간의 대숲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눈앞이 온통 하얀 자작나무 숲은요? 나뭇가지 위에 핀 눈꽃을 마주한 적은 있으신가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걸은 기억은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처음 발자국을 남긴 추억은 어떠신가요?

사진은 사진작가 고 김영갑(1957∼2005)이 1999년에 남긴 남이섬의 겨울 풍경입니다. 남이섬 작업을 마치고 제주도로 내려간 김영갑은 이듬해 루게릭병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김영갑이 제주도 바깥에서 찍은 마지막 작품인 셈입니다. 제가 겨울마다 펼쳐 보는 사진이지요. 눈은 추억입니다. 올겨울엔 놓치지 마십시오.

편집장  손민호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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