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51) 난파 홍영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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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홍난파는 이번에는 「구니다찌」음악학교에 편입으로 입학하였고 동경교향악단의 제1바이얼린 연주자가 되어 활약하면서 1929년 봄 이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인 『음악계』를 창간하였고,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얼린독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어서 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단체인 조선음악가협회를 창립하고 상임이사가 되어 협회를 이끌어 갔다.
이외에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경성보육학교에서 음악강의를 하여왔고 빅터레코드 회사의 고문이 되었고, 홍성유·이영세와 함께 「난파트리오」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그는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여 음악교육과 음악의 대중화에 분투 노력하였다.
이렇게 모든정열을 음악에 쏟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중에 뜻밖에도 그가 사랑하던 세사람의 여인이 한꺼번에 사라져 그의 가슴에 큰 상처를 입힌 사건이 일어났다.
첫째는 그의 피아노 반주자이고 열렬한 애인이던 김영의와 헤어지게 된 것이고. 둘째는 그가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던 조카딸 옥임이가 친구의 불행한 처지를 동경해 함께 철도자상을 한 사건이고, 세째는 경성보육학교강사시절부터 사랑하던 제자 서금영이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 세가지 뜻하지 않았던 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홍난파는 이 땅에 더 머물러 있을수없어서 1931년 7월 미국으로 떠났다. 그때 마침 미국으로 유학하는 변영노·고황경과 동행이 되어 일본 요꼬하마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생각하면 1931년은 홍난파의 생애에 있어서 행운으로 시작되어 불행으로 끝난 해였다. 그해 2월 그는 동호자인 현제명·채동선·독고선·김영환과 함께 조선음악가협회를 조직하여 상임이사에 취임하였고, 5월에는 첫번째의 협회공연까지 치렀다.
그러나 뜻밖에도 3월에는 애인 김영의와 자의반 타의반으로 헤어져야 했고, 이 슬픔이 가라앉을 사이도 없이 4월에는 옥임이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고, 7월에는 서금영이 병으로 별세하여 불행한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었다.
이 크나큰 슬픔을 안고 미국에 도착한 홍난파는 스워우드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동요백곡집』 중 완성시키지 못했던것을 전부 작곡하여 곧 내놓았고 시조의 작곡도 많이 하였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노산 이은상이 지은 시조로 지금널리 애창되고 있는 이노래는 홍난파가 미국에서 고국을 그리면서 작곡한것이다. 깊은 밤 산속 절간의 정적을 노래한 걸작임에 틀림없다.
멀리서 고국의 산하를 그리면서 이렇게 시조에 곡을 붙인 그는 친구의 경제적 후원으로 미국에 왔으므로 오래있을 사정이 못되어 일년반만에 슬픔을 잊어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1933년이었다. 귀국후 바이얼린 독주회를 갖기도 하였는데 1940년에는 경성방송국의 양악책임자가 되어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1937년 흥사단사건으로 감옥에서 얻은 늑막염이 악화되어 오래 입원하였다가 1941년 4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의 양악계 개척자로서의 공로는 영구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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