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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경마장에 '알바' 부대가 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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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직업은 아르바이트(알바), 일터는 경마장'-. 29일 경기도 과천 경마장. 수백명의 경마팬에 섞여 전철 4호선 경마공원역 밖으로 나오자 안내원들이 먼저 눈에 띈다.

경마장 입구에서는 마권 발매원들을 만날 수 있고, 4만여 경마팬이 꽉 들어찬 경마장에도 경기를 생중계하는 카메라맨들과 경주마 출발을 알리는 깃발요원 등이 멀리 보인다.

그들 대부분이 알바생이다. 과천 경마장에서 만나는 직원 10명 중 8명 이상(4천2백여명 중 3천5백여명)이 그렇다. 그야말로 '알바 천국'이다.

요즘 대학 졸업 예정자를 중심으로 사회 진출 준비생들이 국내 최대 알바시장인 경마장으로 몰리고 있다. 경기 침체로 극심한 취업난이 이어지는 탓이다. 용돈 벌기 수준에 그쳤던 알바가 이젠 하나의 직장이자 일터로 자리잡았다.

하루 매출 6백50억원, 경마팬 4만여명이 몰리는 과천 경마장. 경기가 진행되는 주말에만 출근하는 이곳의 알바는 1년이라는 다소 긴(?) 근무 계약을 한국마사회와 하는 데다 일반 직원과 비슷한 복지 혜택도 누려 일반 아르바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대기자만 1천여명에 달해 대학가에선 '경마장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국마사회 김병호 인사팀은 "경마장 알바는 정규직 못지않게 철저한 프로의식을 갖춰 고객 사랑과 애사심이 강하다"며 "서류전형.면접.수습 등 채용과정도 공채 사원들과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마장 알바는 여성이 대부분인 발매원과 안내원이 있고, 남성이 주로 맡는 안전요원과 경마장 자갈 고르기, 흰색 깃발 올리기, 결승선 거울 닦기, 말 오줌 채취 등을 맡는 직원 등 종류도 다양하다.

***깃발요원 이윤식씨

이윤식(25.한경대 3년)씨는 경기장 트랙에서 경마 출발을 알리는 깃발 요원으로 지난해 말 입사한 초년병. 그는 출근하면 관람객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빨간 옷으로 갈아 입고, 흰색 깃발과 무전기를 들고 첫 경주가 시작되는 오전 11시 이전에 트랙으로 나선다.

이씨는 "출발을 기다리며 말과 경마팬의 시선이 내게 모아질 때 내 인생의 깃발을 올리는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고 말했다. 그는 "말이 낙마했거나 부정 출발할 때가 가장 안타깝다. 경마장 알바는 졸업 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마권 발매원 이은하씨

마권 발매원 이은하(35)씨는 주중에 조흥은행 안양지점에서 대출 보조 알바를 하다 주말엔 경마장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지난해 뒤늦은 나이로 안양과학대에 합격해 대학 꿈을 이룬 그는 취업난은 물론 공부와 자녀(초등 2년생) 때문에 알바로 일하지만 두 인생을 사는 프로 직장인이다.

이씨는 "주말에 종종 남편.아들과 함께 경마장에 와 두 사람은 경기를 보거나 공원에서 공놀이를 한다"며 "보수도 알바치곤 꽤 많아 이틀에 10만원 이상 받는다"고 소개했다.

***귀빈 안내원 박혜연씨

귀빈(VIP) 관람석 안내원 박혜연(29)씨는 경희대를 졸업한 2000년 경마장에 입사, 경력 3년째인 알바 터줏대감.

완벽한 어학 실력 탓에 주로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그는 "지난해 월드컵 때 경마장에 왔던 미국 외교관이 최근 다시 찾아와 반가워할 때 보람을 느꼈다"며 "한국 관광 산업의 전도사처럼 가슴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경마장 알바의 또 다른 강점은 복지 혜택이 여느 직장보다 낫다고 한다. 한국마사회의 콘도 이용은 물론, 건강검진에 출산 휴가.경조사 비용까지 지원받는다.

박씨는 "2000년 말 결혼했는데 예식장에 회사 경영진이 축의금을 들고 찾아와 기뻤다"며 "올 봄엔 수십만원짜리 정밀 건강검진을 받았고, 여름 휴가 때는 제주도 콘도를 이용할 생각"이라고 자랑했다.

***마권 발매원 손정주씨

내년에 순천향대를 졸업하는 마권 발매원 손정주(23)씨는 남자 친구와 주말 데이트를 경마장에서 한다. 입사 3년차인 그는 주말마다 일을 해야 하는 경마장 알바의 약점을 오히려 활용하는 셈이다. 손씨는 "알바 선후배들 중에는 일하면서 데이트를 즐기다 결혼으로 골인하는 커플이 꽤 많다"고 소개했다.

그는 경마팬들과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직접 마주치기 때문에 그들이 베팅할 기수나 돈을 놓고 고민하다 자신에게 찍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많아 난처한 적도 많단다.

***카메라멘 권영민씨

수원대 4학년인 권영민(25)씨는 주말 아침마다 경마장으로 향한다. 카메라맨인 권씨는 경마장 주변 곳곳에 설치된 1천여개 모니터의 작동 상태를 체크한 뒤 경기가 시작되는 오전 11시 이전에 관람석에 마련된 중계 카메라실로 간다.

전국 경마팬들에게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경마장 근무 1년6개월째인 그는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경마장 알바는 직업으로서 보람이 있다"며 "술집 웨이터.동사무소 보조원.주유소 주유원 등 대학 초년병 시절 했던 알바와는 다르다"고 자랑했다.

이원호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사진설명>
지난 22일 경기도 과천 경마장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요원들(왼쪽부터 이윤식, 이은하, 박혜연, 손정주, 권영민)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그 뒤로 1천8백m의 경주로와 4만명이 운집해 경주를 지켜보는 관람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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