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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독재 때 강제 입양된 손녀 39년 만에 찾았지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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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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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마리아니 이사장이 24일 39년 만에 손녀와 재회했다. 그러나 이튿날 유전자 검사 결과 친손녀 클라라가 아니었다. [사진 아나이재단]

“손녀 찾기는 계속될 겁니다. 누구도 잊혀져선 안 됩니다.”

반체제 운동 이유로 엄마 피살
경찰 납치된 손녀와 극적 만남
하루 만에 유전자검사 뒤집혀
그간 실종 아기 119명 찾아줘
“내 손녀 찾기, 포기 않고 계속”

 39년 만에 손녀를 찾은 기쁨은 단 하루 만에 악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92세의 ‘아르헨티나 인권 대모(代母)’는 다시 희망을 갖기로 했다. 아르헨티나 인권단체 아나이재단의 마리아 마리아니 이사장 얘기다.

 아나이재단은 24일(현지시간) “마리아니 이사장이 포기하지 않고 찾아왔던 손녀 클라라(39)와 재회했다”고 발표했다. 1976년 생후 3개월 된 손녀와 생이별한 지 39년 만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정치범의 자녀를 납치해 남의 집에 강제 입양시켰다. 아르헨티나 전역이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기적 같은 일”이라고 들썩거렸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트위터에 축하 메시지를 띄웠다.

 하지만 기적은 하루 만에 청천벽력이 됐다. 아르헨티나 법무부 산하 ‘강제 입양된 아이찾기’ 위원회의 파블로 파렌티 위원장이 25일 “공식 유전자 검사 결과 마리아니 이사장과 클라라라고 알려진 여성이 혈육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파렌티 위원장은 “유일한 친자 확인 공식 기관인 국립유전자자료은행(BNDG)의 검사 결과”라며 “앞서 두 사람의 유전자 검사를 실시한 민간 검사기관이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클라라가 아닌 것으로 확인된 여성은 마리아 엘레나였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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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손녀 클라라. [사진 아나이재단]

 정부 발표 직후 마리아니 이사장은 “BNDG의 검사 결과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신중한 모습이었으나 26일 “친손녀가 아니란 사실을 인정한다”고 발표했다고 BBC가 보도했다. 마리아니 이사장의 대변인 후안 마르틴 파딜라는 이날 기자 회견에서 “마리아니 이사장은 큰 비탄에 잠겼다.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이어 “그의 손녀 찾기는 계속될 것”이라며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고 전했다”고 강조했다.

 파렌티 위원장은 엘레나와 관련해 “그의 유전자는 강제 입양된 혈육을 찾는 다른 가족들과도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며 “마리아니 이사장을 기만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마리아니 이사장의 손녀 찾기는 그가 쓴 편지가 지난 3월 공개되면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난 네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단다. 그 사람들(군부 정권)은 네가 엄마와 함께 살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난 그 말을 결코 믿지 않는단다. 너를 껴안고 내 눈으로 보는 게 나의 마지막 꿈이며 마침내 서로를 찾아낼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다.”

 클라라는 76년 11월 24일 경찰에게 납치됐다. 클라라 아버지인 다니엘 마리아니가 반정부 좌익 무장단체 몬토네로스의 단원이라는 이유였다. 클라라의 어머니도 같은 단체 단원이었다. 클라라가 납치된 날 군부 정권의 정보부 요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마리아니 집을 급습했다. 클라라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당시 집에 없어 위기를 모면한 클라라의 아버지는 8개월 뒤 시신으로 발견됐다.

 마리아니 이사장은 아들 내외를 잃은데다 손녀의 행방은 묘연했다. 군부 정권이 반체제 인사들의 자녀를 납치해 강제 입양시키던 시절이었다. 그는 77년 같은 처지의 여성들과 군부 정권 기간 중 실종된 아기들을 찾는 인권단체 ‘5월광장 할머니회’를 설립했다. 85년 군부 정권이 종식된 후 잃어버린 아기 찾기 활동이 탄력을 받았다.

 군부 정권 하에서 숙청된 반정부 지식인, 좌파 조직원은 약 3만 명에 이른다. 이들의 자녀 500여 명이 납치되거나 강제 입양됐다고 현지 언론은 전한다. ‘5월광장 할머니회’는 올해까지 119명의 잃어버린 아기를 찾아 가족과 상봉시켰다. 정작 마리아니 이사장은 손녀를 찾지 못해왔다.

 마리아니 이사장은 현재 거의 실명 상태다. 그는 ‘5월광장 할머니회’ 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89년 아나이재단을 설립해 아기 찾기 운동을 계속 하고 있다. 98년 재단은 클라라의 어머니가 살해된 집을 구입해 정권의 만행을 기록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집 벽엔 39년 전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5월광장 할머니회’ 에스텔라 데 카를로토(84·여) 회장은 “마리아니 이사장의 편지 공개 이후 하루 15통에 그쳤던 혈육 찾는 전화가 300통까지 늘었다. 마리아니 이사장이 침체에 빠졌던 우리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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