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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유일호 경제팀에 드리워진 불안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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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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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신문제작담당

조선 왕은 생각보다 권한이 많지 않았다. 신하들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다 왕권이 위협받는다 싶으면 반격을 가했다. 삭탈관직을 명하고, 유배를 보냈다. 능지처참으로 단박에 목숨을 뺏기도 했다. 신하들이 상소할 때는 용기가 필요했다. 때로는 목숨을 내놓고 할 말을 다했다. 왕권과 신권(臣權)의 절묘한 견제와 소통이 이어졌다.

 지금은 다르다. 대통령과 소통하면서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 군사정권 때처럼 남산에 끌려가 봉변당하는 일도 없다. 대통령을 설득해보고, 정 안 되면 옷을 벗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부에 자리를 걸고 직언할 정도로 배짱 있는 인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쓴소리를 서슴지 않던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 대통령 곁을 떠났다. 고분고분한 예스맨이 남았다. 토론은 줄고, 대통령이 말하면 받아쓰기 바쁘다. 대통령의 발언은 갈수록 격렬해진다. 사람들은 대통령의 소통 부족을 탓한다. 각료와 참모들은 문제가 없는 걸까. 사표 쓸 각오로 대통령과 소통하려고 애쓴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묻고 싶다.

 국회가 뒷다리를 잡긴 했지만, 경제에 관한 한 박근혜 정부가 내세울 게 별로 없는 듯하다. 정권 첫해인 2013년 지하경제를 양성화한다고 세무조사로 기업을 압박했다. 그해 추징한 세금이 MB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보다 1조6000억원 늘었다. 크고 작은 기업들이 매출 부진에 세무조사가 겹쳐 고통을 겪었다.

 지하경제는 실체가 분명치 않은 개념이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게 얼마나 공허한 얘기인지 노련한 경제 관료들이 모를 리 없었다.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장서 밀어붙였다. 대통령 눈밖에 나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공명심이 발동했거나. 부작용을 남긴 채 지하경제 양성화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창조경제는 집권 3년이 지나도록 헷갈리는 주제다.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를 살리자는 좋은 취지라는 건 짐작이 간다.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창조경제혁신센터나 청년희망펀드는 창조와는 거리가 있다. 관료들이 기업별·지역별로 강제로 떠맡겼다. 창조를 내걸고, 옛날 스타일로 처리한 것이다. 애초에 관료에게 창조적인 일을 맡긴 게 무리였다. 두산그룹 같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앞에서 청년희망펀드에 기부하고, 뒤에선 입사 1~2년차 젊은이의 희망퇴직을 받았다.

 부동산 정책은 논란이 있지만, 규제완화를 통해 활로를 뚫은 건 다행이다. 거래가 막혀 있어 대책이 필요했다. 부동산 덕분에 올해 경제가 완전히 가라앉는 사태를 막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부작용 없이 연착륙을 시켜야 한다. 시장을 언제 어떻게 조여야 할지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정부는 내년 1월부터 하려던 부동산대출 규제를 서울은 2월, 지방은 5월로 늦췄다. 내년 4월 총선을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

 최경환 경제팀은 온통 총선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최 부총리 본인이 친박 진영의 좌장 격이다. 유일호·유기준 의원은 장관직을 경력 쌓기용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출마를 준비 중이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경제정책과 표를 쫓아다니는 총선이 뒤죽박죽 섞인 셈이다. 국회만 욕할 수 있겠는가.

 내년에 경제가 더 나빠질 전망이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디플레가 엄습하고 있다. 자영업자 사이에선 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총선은 또 다른 악재다. 새 경제부총리로 낙점된 유일호 후보자는 막판까지 출마를 저울질한 정치인이다. 단발성 부양책이나 포퓰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유일호 경제팀의 임기는 길어야 2년이다. 2년을 채우나 중도에 그만두나 오십보 백보다. 언제든지 장렬히 물러날 수 있다는 각오로 소신껏 일하기 바란다. 그게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는 길이기도 하다. 성과가 없거나 논란이 있는 정책은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규제 완화나 좀비기업 정비처럼 밀어붙일 건 밀어붙이고, 일회성 이벤트에 매달리지 말고. 가장 필요한 덕목은 대통령에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직언하는 용기다. 두려울 게 뭐가 있나. 조선시대처럼 목숨을 거는 것도 아닌데.

고현곤 신문제작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