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 투성이 얼굴 … 다시 뛰는 예비역 군데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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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렐라’ 이정협은 올해 K리그 경기 도중 큰 부상을 당했다. 두 달 만에 복귀한 그는 내년에 다시 비상을 꿈꾼다. 작은 사진은 슈틸리케 감독. [사진 아디다스]

“대한민국 청춘들이 ‘군데렐라’를 보며 희망을 가졌으면 해요.”

2015년 축구대표팀의 진주, 이정협
슈틸리케가 전격 발탁, 재능 펼쳐
안면골절 이기고 태극마크 재조준
“밑바닥서 EPL 오른 바디가 자극
도전이란 긴 싸움 이어갈 힘 얻어”

 올해 한국 축구에서 최고의 ‘신데렐라’ 로 꼽혔던 이정협(24·부산 아이파크)이 대한민국 미생(未生)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지난해까지만해도 무명이었던 이정협은 올해 1월 호주 아시안컵 엔트리에 깜짝 발탁돼 2골을 터뜨리며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지난 8월 동아시안컵에서도 그는 맹활약을 펼치며 한국의 우승에 일조했다. 그래서 K리그 상주 상무 소속이던 그는 ‘군데렐라(군인+신데렐라)’로 불렸다. 광고 촬영을 위해 제주에 내려간 그를 24일 만나 최고의 한 해를 보낸 소감을 들어봤다.

 이정협은 “어린 시절 아버지는 화물선을 탔고, 어머니는 식당일을 했다. 형편이 어려워 누나는 나 때문에 미술을 포기했다. 학창 시절 선배들이 신던 축구화를 받아 스터드만 교체해 신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스포츠용품사와 계약해 축구화를 마음껏 신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협의 축구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그에게 ‘축구인생 그래프’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위아래로 큰 변곡점을 그렸다. 굴곡 많은 그의 축구인생이 시작된 것은 동래고 2학년. 이정협은 “당시 지동원(24·아우크스부르크)이 뛰던 광양제철고에 0-5로 대패했다. 감독님께 ‘난 축구로 성공하지 못할 것 같으니 그만두겠다’고 말한 뒤 펑펑 울었다”고 회상했다.

 2013년 K리그 부산에 입단해 프로무대에 도전했지만 데뷔 첫해 2골에 그쳤다. ‘수비형 스트라이커’라는 따가운 별명이 붙었다. 그해 말 개명(改名)을 하고, 이듬해 1월 상주에 입단하면서 그래프가 오르막을 그렸다. 이정협은 “작명소에서 본명인 정기(廷記)‘를 ‘정협(庭協)’으로 바꾸면 좋다고 해 그대로 따랐다. 군에 입대한 뒤엔 산으로 둘러싸인 국군체육부대에서 축구에만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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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지난해 9월 축구대표팀을 맡은 울리 슈틸리케(61·독일) 감독이 달라진 이정협을 알아봤다. 슈틸리케 감독은 체력이 좋은 ‘일병’ 이정협을 대표팀에 뽑았다. 이정협은 “내 축구 인생 최고의 순간은 아시안컵이다. 슈틸리케 감독님께서 ‘솔다도(soldado·스페인어로 군인), 네가 잘하든 못하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힘을 실어 주셨다”고 고마워했다.

 그의 인생 그래프는 그러나 불의의 부상과 함께 다시 하향세로 돌아섰다. 상주에 복귀해 K리그 경기를 치르던 도중 상대 선수와 부딪혀 안면복합골절 부상을 당했다. 이정협은 “부상 당시 얼굴이 움푹 파였고 뼈가 각막을 건드려 사물이 두 개로 보였다. 아직도 얼굴 곳곳에 흉터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회복에 반 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이정협은 두 달 만에 그라운드에 돌아왔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9월 라오스와 경기 후 “이정협을 잊지 않고 있다”며 힘을 실어줬다. 이정협은 “나 같은 미약한 존재를 잊지 않으셨더라. 빨리 부상에서 회복해 다시 태극마크를 달겠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정협의 축구인생 그래프는 여전히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올해 상주의 K리그 클래식(1부리그) 승격을 이끌었지만, 지난 10월 전역과 함께 합류한 원소속팀 부산이 2부리그로 강등됐다. 더구나 대표팀에선 경쟁자인 석현준(24·비토리아)과 황의조(23·성남)가 급성장 중이다.

 이정협은 요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레스터시티 공격수 제이미 바디(28·잉글랜드)의 성공에 큰 자극을 받고 있다. 바디는 20세이던 지난 2007년 아마추어 8부리그 팀에서 뛰었던 무명 선수 출신이다. 7부→6부→5부→2부 리그를 거친 바디는 올 시즌 1부리그에서 11경기 연속골을 터뜨리며 신기록을 세웠다. 이정협은 “밑바닥부터 정상까지 올라온 바디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문전에서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움직임을 닮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협은 “대한민국 청춘들도 제이미 바디와 나같은 이를 보면서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도전자로 돌아가 긴 싸움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2016년 목표를 묻자 이정협은 “‘반짝 빛난 군데렐라’ 보다는 ‘예비역 대한민국 스트라이커’라 불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협은 2016년 인생 그래프 점선으로 그렸다. 그 끝은 자신이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꼽은 아시안컵 준우승보다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서귀포=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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