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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 "얼마나 많은 독립군의 희생이 있었는지조차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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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후손,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 인터뷰

광복 70주년이 저물고 있다. 올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부쩍 늘었다. 광복 70주년에, 영화 '암살'의 흥행 등의 영향이 컸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매우 낯선 풍경,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일장기가 게양되고 모두 멈춰서 묵념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당시의 민족문화와 사회, 그리고 영화 속의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준식 연구위원(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을 만났다.

이준식 연구위원이 활동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청산을 포함한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문제에 관한 연구와 실천을 하고 있는 곳이다. 민족문제연구소를 영어로 표기하면 (Center for Historical Truth and Justice).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역사적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시민단체이자 연구단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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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사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1920년의 청산리전투는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에 같은 해의 봉오동전투, 그리고 이 두 전투와 함께 무장투쟁의 3대대첩이라고 불리는 한국독립군의 대전자령 전투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게 아쉽습니다. 그나마 무장투쟁의 지도자는 이름이라도 남아 있어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고 교과서에도 이름이 실리니 다행이지만 정작 독립전쟁의 일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다가 산화한 뒤 만주벌판의 고혼이 된 무명의 독립군 전사들을 후손인 우리가 제대로 기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죠.”

이준식 연구위원은 아쉬움부터 토로했다.

“얼마나 많은 독립군 전사들의 희생이 있었는지조차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 정부를 수립한 지 67년이나 되었는데도 독립군의 전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무명전사 기념탑 하나 건립하지 못한 데 대해 독립군 지도자의 후손으로 죄스러운 마음을 늘 갖고 있습니다.”

영화 암살에 등장한 이상하고 낯선 풍경에 대해 물어보았다.

“묵념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요 사실, 암살이라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33년에는 그런 의례가 없었습니다. '정오의 묵도’라고 불리는 묵념은 1930년대 말 이후에서나 생긴 의례입니다.”

특히 이른바 전시체제였던 1940년대에 일제는 내선일체 즉 일본인과 조선인이 하나다라는 것을 강요하기 위해 국기에 대한 의례를 강화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회 여러 부분에서 일제 때 하던 일이 그대로 되풀이되었는데, 국기에 대한 의례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유신 시절이던 1970년대에는 오후 6시(겨울은 오후 5시)에 국기하강식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동작 그만의 상태로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제로 들어야만 했단다. 영화 속에서 보던 일제시대의 그 장면이 1970년대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기하강식은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없어졌습니다. 참 오래 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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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의 사진으로, 고등학생이 국기하강식에서 경례하고 있다. 뒷편으로 당시의 정부종합청사인 조선총독부와 광화문이 보인다. [사진=중앙포토]

이 또한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예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이 독일의 나치 청산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친일파에 대한 사법적 처리를 담당하는 반민족행위처벌특별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반민특위가 출범할 수 있었던 데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반드시 친일청산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헌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유진오가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근거규정이 추가된 것에 대해 “누가 그것을 먼저 주장하고 나섰던지는 지금 기억이 없으나 그때의 정세로는 누구든지 그것을 주장하기만 하면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다”고 한 증언을 통해 당시 분위기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 활동은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 반민특위가 친일청산 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친일파와 그 비호세력에 의한 친일청산 반대 움직임이 너무 거셌기 때문이죠. 이승만 대통령도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는 데 일조 했고요."

민족의 여망인 친일청산이 왜곡된 것은 해방 이후 친일파가 반공을 앞세워 다시 기득권층으로 부상한 것과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현상이었다고 그는 해석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국가권력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군, 경찰, 검찰, 사법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친일세력은 늘, 언제나 권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친일은 금단의 역사가 되어 버렸고 이미 뿌리를 깊게 잡아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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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행사에 참여한 참가자가 태극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사진=중앙포토]

이준식 연구위원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고나갈 청소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올해가 광복 70년이 되는 해인데요, 광복은 어느 날 갑자기 누구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린 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암살'에 몇 차례 되풀이되는 이야기가 바로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선열들의 노력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고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무엇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험한 독립운동의 길,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를 그 길로 이끌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의 하나 우리 앞에 '암살'의 강인국이나 염석진 같은 친일파의 길과 안옥윤이나 속사포 같은 독립운동가의 길 가운데 선택의 순간이 주어졌을 때 어떤 길을 걷는 것이 올바를까요? 사리사욕 때문에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친일의 길이 아니라는 걸 인식할 정도로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인생의 선배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바랄 뿐입니다.”

글=오지환(안곡고 1) TONG청소년기자, 청소년사회문제연구소 안곡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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