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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응팔을 보며 꿈꾸는 위아래 없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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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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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무대는 독특한 동네다. 이 동네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가부장의 부재’다. 이순재로 상징되는 권위적인 가장도 최불암으로 상징되는 마을의 어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동네를 움직이는 것은 아줌마들의 수평적 연대다. 베풀 줄 알되 생색은 내지 않는 쿨한 맏언니 라미란을 중심으로 한 엄마들의 시스터후드가 동네의 중심축이고, 철없거나 만만한 아빠들은 여기 업혀가고 있다. 잔소리는 하지만 억압하지는 않는 엄마들의 치세하에 아이들은 각자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우표 수집, 바둑, 연애, 심지어 올림픽 피켓걸까지. 이 동네 사람들은 속정 깊고 협동할 줄 알지만 이웃이 원치 않는 수준의 간섭은 삼가고 지켜보는 세련됨도 갖추고 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마치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 나오는 뉴요커들처럼 성별을 넘어 편안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렇다. 이 동네는 실제 한국 사회와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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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남다르다. 신원호 피디가 응답하라 시리즈 제작과정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대학 동아리가 축제 기획하듯 한다고 해야 할까? 줄거리를 짜기 위한 회의 때 온갖 과자류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피디, 메인 작가부터 막내 작가까지 밤새 떠든단다. 누가 이거 어때? 하면 저쪽 구석에서 별로야, 또는 ‘헐’이 날아오고. 어느새 다른 잡담과 농담으로 한참 왁자지껄하다가 누군가 이거 재밌지 않을까? 불쑥 얘기하고. 그야말로 계급장 떼고 위아래 없이 막 던지다가 얻어걸리는 아이디어들을 구슬 꿰듯 꿰어 드라마를 만들어 간단다. 회사 내부 상영회에서의 가차 없는 피드백을 통해 내용을 수정해 가는 픽사의 영화 제작과정과 닮았고, 윗분 변덕 하나가 아랫것들 100명의 밤샘보다 중요한 한국 조직 문화와는 다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제작진은 겉으로는 기존 한국 사회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많이 다른 이상적인 가정 및 마을 공동체 판타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제작진 및 주시청층 세대의 갈증이 녹아 있다. 그건 ‘대발이 아버지’나 ‘파파 스머프’의 권위에 일사불란하게 순종하던 시대의 감각과는 많이 다른 방향이다.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분들 또한 많은 것을 알지만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며 흐르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