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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헌 심판대에 오른 일본의 ‘부부 동성’ 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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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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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에 사는 학원강사 다나카 에미(田中?美·41)는 18년 전 결혼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행복했지만 친정의 성(姓)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23년간 ‘사카이 에미(酒井?美)’로 살아왔죠. 그런데 갑자기 ‘다나카’로 성을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닫고 펑펑 울었어요. 제 자신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뽑히는 느낌이었죠.” 그러면서 결혼 전 이름 ‘사카이 에미’가 선명하게 찍힌 업무용 명함을 내밀었다.

 일본 대중이 성씨를 갖기 시작한 건 메이지 시대(1868~1912). 초기에는 부부가 각자의 성을 갖는 것도 허용됐다. 하지만 1898년 메이지(明治)민법이 “호주 및 가족은 그 집(家)의 성(氏)을 쓴다”고 정하면서 부부와 자녀는 같은 성을 써야만 했다. 전후(戰後) 일본국 헌법이 ‘남녀 평등’을 명문화한 이후 남편이 부인의 성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해졌지만 무남독녀 집안의 가업을 잇는 데릴사위를 빼곤 별로 없었다. 남성 중심의 일본 사회에서 여성 90% 이상은 여전히 남편의 성을 쓰고 있다. 117년 전 ‘부부 동성(同姓)’ 규정은 현행 일본 민법 750조에 그대로 남아 있다.

 결혼과 함께 성을 바꾼 여성 상당수는 한 달가량 번민의 시간을 보낸다. 여권과 운전면허증, 은행계좌, 신용카드, 인감도장, 버스와 전철의 기명 승차권까지 이름을 하나하나 바꾸며 남편의 삶에 종속돼 버린 듯한 자신을 거듭 발견한다. 복잡한 절차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건 물론이고 개명 신청에 따른 비용도 적지 않다. 원래 이름으로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온 직장 여성의 경우 고민이 더 크다. 거래처 사람들이 담당자가 바뀐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아서 두 개의 이름을 함께 쓰기도 한다.

 일본 정부는 1985년 유엔 ‘여성차별 철폐조약’ 비준을 계기로 불합리한 민법 규정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법무상의 자문기관인 법제심의회는 96년 부부가 원하면 각자의 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선택적 부부 별성(別姓)’ 제도를 골자로 민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가족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자민당 내부 반발에 부딪혀 개정안은 국회에 제출되지도 못한 채 폐기됐다.

 강산이 두 번쯤 바뀔 만큼 시간이 또 흘렀다. 나흘 뒤인 오는 16일 일본 최고재판소 대법정은 민법 750조의 위헌 여부에 대한 첫 판결을 내린다. 일본 사회와 가족 제도를 크게 변화시킬 만한 중요한 판단이다. 여성에게만 이혼 후 6개월간 재혼을 금지한 규정도 위헌 심판대에 함께 올랐다. 태어날 아이의 친부(親父)가 누군지에 대한 다툼을 막기 위해 제정됐지만 여성 차별 법률로 꼽혀 왔다. DNA 감정을 통해 친부 확인이 가능해진 만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일본 여성계는 남녀 평등과 개인 존중에 반(反)한다는 최고재판소의 결론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 다나카 에미는 다시 ‘사카이 에미’가 되는 꿈을 꾸고 있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