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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배로 교수에게 듣는 한국경제] 정부, 기업에 이래라 저래라 해선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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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세계 어느 국가든 성장 발전을 위해선 인적.물적 자본을 키우고 생산성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은 하버드대 경제학과의 로버트 배로(58)교수가 이미 오래 전부터 주창해온 경제성장이론의 기본틀이다.

과거 포스코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지난 5월에는 서울대에서 잠시 강의를 맡았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깊은 경제석학이다. 하버드대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한국의 새 정부 출범에 따른 경제적 과제와 전망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편집자>

-한국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보는가.

"잘 살겠다는 강한 의지와 높은 교육열, 비교적 준수됐던 법치와 사유재산권, 많은 저축과 투자 등 좋은 요소는 모조리 갖췄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모델이 될 만큼 경이로운 성장을 했다. 1997년 금융위기도 잘 넘겼다. 미국 등 외국에 비해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도 전 계층에 더 잘 분배됐고 평균수명 등 각종 사회지표들도 크게 향상됐다. 물론 이제는 교육개혁 등 새로운 차원의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90년대 중반 폴 크루그먼 등 미국 경제학자들은 총요소생산성(TFP) 개념을 내세워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국가들처럼 성장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많이 했다. 최근 아시아 경제가 주춤하는 것은 과연 그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크루그먼은 경제성장에서 과학기술의 역할만 지나치게 중시했다. 그동안 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성장에서 인적자원과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줬다. 과학기술은 이에 수반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아직 충분히 활용 안된 우수한 여성인력이란 자원을 갖고 있다. 총요소생산성 개념으로 따져도 한국은 2%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 정도면 결코 나쁜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안에서는 경제문제로 불안감이 크다. 당장 노조문제가 터져나오고 있고 새 정부의 경제정책이 너무 진보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예측 가능성도 떨어졌다.

"사실 그동안 새 정부가 보여준 친(親)노조 성향이나 각종 사회복지정책들은 좀 의아스럽다. 이는 시장경제원리에도 안 맞고 성장 요인들과도 거리가 멀다. 80년대 성장보다 사회복지에 치중했다가 실패한 유럽국가들을 따라가는 것인데 한국에는 맞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경제를 위험하게 할 뿐이다. 유럽은 과거 오랜 자본주의로 축적된 여유가 있어 한동안 사회복지에 눈돌릴 여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전통적인 사회복지국가들인 스웨덴.덴마크.네덜란드 등이 이미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 등에 나섰다. 영국은 물론 스페인.이탈리아도 미국 모델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물론 독일은 예외다. 아직도 시장지향적이 아니다. 독일 경제가 요즘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동.서독의 통일사례와 그 과정에서 나타난 서독 노조의 부정적 역할도 한국은 연구해야 한다. 통일 후 서독의 노동자들은 동독 노동자와 경쟁을 피하려 노동시장을 통합하지 않고 대신에 동독에다 돈만 주도록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서독은 재정적자가, 동독은 높은 실업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자신감을 잃은 측면도 있다. 그래서 다들 불안해하며 저마다 서로 다른 개혁을 주장한다. 어떤 개혁이 한국에 필요한가.

"우선 외환위기는 외국인 투자를 위해서는 금융시장의 투명성 확보와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주었다. 그에 따른 제도적 장치를 꾸준히 갖춰나가야 한다. 아직도 많은 외국인은 '한국에서는 은행소유가 어렵다'고 말한다. 이는 금융시장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재는 국제적 척도다. 기업개혁은 투자와 혁신, 생산성 증가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현재는 무조건 반(反)재벌로 흐르는 모양새다. 물론 소액주주 보호 등 투명 경영, 문어발식 자회사 방지 등의 제도는 필요하지만, 정부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된다. 과거 정권들이 재벌과 너무 유착되다보니 현 정부가 차별화 때문에 더욱 반재벌적 성향을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최근 2주 동안 SK그룹의 상황을 더욱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금융기관의 외국인 소유문제를 언급했는데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당장 조흥은행 분규가 터졌는데.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조흥은행 건은 과거 대통령이 노조입장을 두둔했던 게 더 화근이 됐다고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친노조정책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저해한다. 이는 기존 노조원들이 기득권을 위해 신규 인력의 시장 진입을 막고 경쟁을 제한한다. 결국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다들 열심히 일할 이유를 못 찾게 된다. 외국투자자들의 신뢰도 떨어진다. 또 대통령의 발언은 상대방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달라져서는 안된다. 물론 현실적.정치적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는 결국 신뢰성과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특히 북핵문제가 불거진 상황 아래서 외국투자자들은 지금도 盧대통령의 발언을 항상 주시한다."

-한국 경제는 지난해까지는 그래도 소비가 성장을 뒷받침했다.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가계부채에다 신용카드 부실, 기업의 투자축소, 반도체 등 주요 수출 품목의 가격하락 등이 겹치고 있다.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당장 수입비중이 큰 원유만 봐도 안정세로 돌아섰다. 다행이다. 반도체 가격도 2000년 무렵에 비하면 낫다. 다만 기업의 투자가 줄어든 것은 조짐이 안좋다. 투자는 기업들이 향후 경제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지표다. 장기 전망이 불확실해진 탓이다. 정부가 기업에 확신감, 예측 가능성을 심어주지 못한 결과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앞으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성숙한 경제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다. 지난 40년간 거의 매년 6% 이상 성장했던 게 비정상적이다. 한국인들은 성장률이 4%대로 떨어졌다고 걱정하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이같은 수치도 대단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삼성전자의 성공은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앞으로 더 성장하려면 앞서 말한 노조.개혁 부문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한국은 현재 교육을 위해 외국으로 향하는 행렬이 줄을 잇는다. 그동안 한국의 교육개혁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여왔는데 조언이 있다면.

"사실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생산성.기술 등은 물적 자원이 아니라 인적 자원에서 나온다. 교육과 경제는 별개가 아니다. 그동안의 국공립 위주의 교육만으로는 이제 한계가 있다. 대학은 물론 초등.중등교육에도 우수한 사립학교를 대거 육성해 국공립과 경쟁도 하면서 인재를 효율적으로 길러내야 한다. 물론 획일적인 평등주의를 내세운 저항들이 만만찮을 것이다. 하지만 다같이 못 배울 것인가. 한국이 더 도약하려면 교육개혁은 필수적이다."

-최근 남미국가들의 상황은 어떻게 보고 있나.

"매우 실망스럽다. 칠레를 제외하고는 다들 부진하다. 정치적 불안정에다 노조문제,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금융시스템이 아예 무너졌고 투자도 끊겼다. 아르헨티나 사례는 한국이 항상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멕시코는 괜찮다. 북미자유무역협정 이후 투자와 무역이 활발해졌다. 브라질은 아직 좀 의문스럽다. 새 정부가 시장경제를 말하지만 진보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했기에 두고 봐야 한다. 콜롬비아.베네수엘라.페루 등은 남미의 전반적 문제에다 인디오 등 인종.계층별 갈등까지 겹쳐 도약이 당분간 힘들 것 같다."

-미국 수출의존도가 큰 한국으로서는 미국경제도 큰 관심사다.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최근 내놓은 감세정책은 소비.지출 확대가 실질적으로 이뤄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 초기에 내놓았던 1단계 감세정책안은 별 효과가 없었지만 이번 건은 잘됐다. 이라크 전쟁도 끝나고 주가도 오르고, 아직은 중동문제와 북핵 문제가 남아 있지만 테러 이후 불거진 불안심리는 좀 가셨다. 전반적으로 전망이 좋다. 디플레이션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실제 가능성은 작다."

정리=이효준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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