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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생각지도

풍수보다 중요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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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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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때아닌 풍수(風水)가 새삼 관심이다. 전직 양김(兩金) 대통령의 묏자리가 봉황의 양 날개에 해당하는 대명당이란 해석이 나오면서다. 조상의 음덕(蔭德)을 바랄 요량이라면 의당 두 대통령의 조상 묘 터부터 살필 일이지만, 그래도 대통령까지 지낸 인물들의 묏자리고 보니 대중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묘지 위치와 크기가 권위를 규정하진 않아
천명과 민심을 잘 읽어야 커지는 사후 권위

그렇더라도 신문과 방송까지 덩달아 나서 비과학적 사실에 대한 보도를 쏟아내는 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대중의 눈과 귀를 좇는 게 저널리즘의 속성이라지만 정론이 아니면 삼가야 하는 게 품격 있는 언론의 도리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인류의 지식은 옛사람에 비해 크게 늘었을지 몰라도 지혜는 그리 더할 게 없는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은 무지해서 온갖 미신을 가슴에 동여매고 살았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풍수도 그렇다. 오늘날까지 살아 꿈틀대는 풍수를 그 옛날에도 배격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세종 때 명신 어효첨이 그중 하나다. 그가 집현전 교리로 있을 때 국운 융성을 위해 북쪽 길을 막고 성 안에 산을 쌓으며 개천을 맑게 해야 한다는 풍수 논의가 있었다. 이에 효첨이 장문의 상소를 올리는데 내용이 절절하다. “무릇 운수의 길고 짧음과 국가의 화복은 다 천명과 인심에 달린 것이며 실로 지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 천명으로 주맥(主脈)을 삼고 민심으로 안대(案對)를 삼아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돌아보시고 백성의 험악한 반응을 두려워하소서.”

 정연한 논리와 곧은 지적에 감탄한 세종이 정인지를 불러 물었다. “효첨의 이론이 그럴듯하오. 그런데 제 부모의 장사에도 풍수를 무시했는지 의심스럽소.” 정인지가 대답했다. “일찍이 효첨이 제 아비를 집 옆에 장사 지낸 걸 보았사온데 풍수와 무관하게 묘를 써놓았나이다.” “장하도다. 효첨이 참선비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자식들은 유지를 받들어 광나루가에 장사 지냈다(재개발로 지금은 여주로 이장됐다). 묏자리가 명당일 리 없지만 후손들도 번창했다. 장남 세겸은 좌의정을 지냈고 차남 세공은 호조판서에 올랐다. 좌참찬을 지낸 계선은 그의 현손이고 강원도 관찰사 진익, 승정원 승지 사회, 호조참의 유봉, 경종의 국구(國舅)인 긍재, 한성부 판윤 유룡이 모두 직계 후손이다. 풍수보단 민심을 따르는 것이 나라를 튼튼하게 한다는 어효첨의 신념을 받든 결과다. 풍수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풍수보다 더 보기 안 좋은 건 따로 있었다. 대통령 묘지들의 크기 말이다. 지혜는 몰라도 지식이 늘었다면 군주와 대통령의 차이를 모르지 않을진대 묘지의 크기에는 그만 한 차이가 없다. 지난해 사망한 대한민국 국민 중 79.2%가 화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보잘것없는 크기의 국토가 죽은 자들의 땅이 되는 걸 걱정하는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이다. 그래서 매년 증가 추세다. 거대 호화 분묘가 오히려 손가락질 받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 대통령 묘지만 그토록 커야 할 이유를 아무래도 찾지 못하겠다.

 국가 지도자가 임기를 마친 뒤 한 사람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서양의 모습이 부럽다. 그들의 영면 장소도 마찬가지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고향 땅 공동묘지의 친지들 곁에 묻혔다. 그의 묘지 앞으로 가려면 같은 크기의 여러 묘지를 지나서 가야 한다. 그래서 추모식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다른 묘지를 밟지 않도록 시에서 나무 발판을 가설해야 할 정도다.

 사실 서양만 그런 게 아니다. “장례는 간소히 치르고 조문소도 설치하지 말라. 화장해서 유분은 바다에 뿌려라. 오늘날의 중국을 있게 만든 덩샤오핑(登小平)의 유지였다. 그의 유해는 화장된 뒤 가족들과 공산당 간부들에 의해 바다에 뿌려졌다. 지도자의 권위가 묘지의 위치나 크기로 드러나진 않는다. 남들(적어도 생전에 그렇게 걱정했던 국민들)과 같아서 오히려 더 커지는 게 사후의 권위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