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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NIE] 아이유 ‘제제’ 가사 논란으로 본 표현의 자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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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은 감상자의 몫 vs 예술에도 책임 따라

가수 아이유의 ‘제제’(zeze)라는 곡을 둘러싼 논란이 지난 한 달간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제제’는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속 아동학대를 겪는 다섯 살짜리 주인공인 제제를 모티브로 한 곡이다. 가난과 폭력 속에서도 순수함을 간직한 제제라는 캐릭터는 아이유를 통해 도발적이고 섹시한 다섯 살 꼬마로 재해석됐다.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 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논란은 일파만파 퍼졌다. ‘해석과 표현의 자유’라는 입장과 ‘예술도 금기가 있다’는 통념이 팽팽하게 맞섰다. 문제를 제기했던 출판사 ‘동녘’이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했다”며 공개 사과를 하면서 논란은 잠잠해졌지만 ‘표현의 자유’의 한계에 대한 사회적 논쟁은 여전하다. 언론과 교과서를 통해 ‘표현의 자유’에 대해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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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한 다섯 살 ‘제제’에 쏟아진 소아성애 비판

아이유는 직접 작사한 ‘제제’에 대해 ‘일종의 사랑 노래’라고 표현했다.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속 주인공 제제에 대해 “매력적이고 섹시한 캐릭터”라는 독특한 해석도 덧붙였다. 소설 속 제제를 자신만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재창조한 제제를 노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래 ‘제제’ 속 가사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으며 아동학대에 분노하고, 소설 속 제제의 슬픔에 공감했던 독자들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묘사가 등장한다. 노래 속에서 제제는 ‘짓궂어’ ‘나쁜 상상’ ‘발그레해진 두 뺨’ ‘교활하지’ ‘더러워’ 등의 표현과 함께 교활하고 섹시한 다섯 살 꼬마로 표현된다. 소설 속 제제를 통해 분노와 슬픔을 공감했던 수많은 독자는 아이유만의 독특한 해석 앞에 고개를 갸웃한다.

 여기에 ‘제제’가 수록된 4집 앨범인 ‘챗셔’(CHAT-SHIRE)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논란을 더 증폭시켰다. 앨범 표지 속 제제는 망사스타킹을 신고 한쪽 다리를 든 섹시한 자세로 누워있다. 타이틀 곡인 ‘스물셋’ 뮤직비디오와 앨범 표지 곳곳엔 아이유가 젖병을 물거나 우유를 뿌리고 립스틱을 뭉개 바른 장면이 등장한다. 일부 문화평론가들은 이와 같은 장면이 성적 이미지를 암시하는 기호라고 해석한다. 이런 상징은 노래 ‘제제’뿐 아니라 4집 앨범 전체적으로 아동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는 소아성애(로리타 콤플렉스)를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노래 ‘제제’가 소아성애를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 대목이다.

예술은 교훈을 줘야한다 vs 미적 가치만 추구한다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표현의 자유’ 논쟁의 이론적 토대를 소개한다. 도덕주의와 심미주의다. 교과서는 “도덕주의는 예술의 목적이 인간의 올바른 품성을 기르고 도덕적 교훈이나 모범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본다…예술가도 사회 구성원이고 예술 활동도 하나의 사회 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예술은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의 도덕적 성숙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설명한다. “예술도 넘지 말아야 하는 금기가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심미주의는 ‘표현의 자유’에 방점을 찍는다. 심미주의는 예술의 목적은 오로지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예술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 영역에서 ‘표현의 자유’ 논쟁은 오랜 논쟁거리다. 대표적으로 예술과 외설 논란이 그렇다.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기준은 창작의 목적과 감상자의 반응 두 가지다. 교과서는 “예술 작품은 감상자에게 미적 가치를 해석하는 즐거움이나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된다. 반면 외설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성적 표현으로 성욕을 자극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적고 있다. 성적 호기심을 도발하기 위해 신체나 성과 관련된 내용만을 부각해 표현하는 것을 외설로 구분하는 것이다. 감상자의 반응 측면에선 다수의 사람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불쾌감을 줄 때 외설로 구분한다.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는 최근의 경향은 감상자의 몫에 더 무게를 두는 흐름이다. “국내에서 선정성 논란이 일었던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는 이탈리아에선 14세 이상 관람가로 허용됐다. 앞서 제7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는 무삭제 버전으로 공개됐고 10분 동안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영등위가 문제 삼은 비윤리적, 반사회적 판단을 그들은 간과한 걸까…결국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관객이 선택하고, 구매한 바로 그 표가 ‘공익을 위한 표현의 자유 제한’이라는 다른 한쪽 추의 무게를 결정할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관객의 기회’는 어느 쪽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중앙일보 2013년 11월 16일 ‘관객의 볼 권리’)

표현의 자유는 민주사회의 필수 가치

언론과 교과서는 ‘표현의 자유’가 갖는 명암을 균형 있게 다룬다. 우선 ‘표현의 자유’는 민주사회에서 필수적인 가치임을 분명히 한다. “내가 불편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참아야 나도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사상과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때로는 상처를 주고 부작용을 낳는다 하더라도 민주사회 보편 원칙으로 실천할 가치가 있다.”(중앙선데이 2015년 2월 1일 ‘[조홍식의 시대공감] 우리가 프랑스의 자유를 아는가’)

 동시에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가 과연 옳은가’에 대한 성찰도 던진다. ‘표현의 자유’는 관용을 전제한다. 관용은 타인의 생각이나 문화가 나와 다를지라도 이를 존중하는 이성적 태도를 말한다.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해야 내 자유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무제한적인 관용은 ‘관용의 역설’ 문제를 낳는다. 교과서는 “관용의 역설이란 관용을 무제한으로 허용한 결과 관용 자체를 부정하는 사상이나 태도까지 인정하게 되어 결국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인종차별 등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까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타인에게 불쾌감을 초래하고, 사회적 통념과 금기를 무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칼날이 될 수는 없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번 아이유의 ‘제제’ 논란은 지난 5월 벌어졌던 ‘잔혹 동시’ 논란과 흡사하다. 초등학교 5학년생이 냈던 『솔로 강아지』라는 동시집에 실린 ‘학원 가기 싫은 날’이라는 시는 엄마를 잡아먹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잔혹성 논란이 일었다. 초등학생이 겪는 억압과 차별을 학원 뺑뺑이를 시키는 엄마에 비유한 시적 표현이었지만 정도를 지나친 잔혹한 표현은 대중의 공감보다는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빛이 가지는 그림자다. ‘학원 가기 싫은 날’은 초등학생이 학원 뺑뺑이를 돌아야 하는 한국 사회 현실을 재고하게 하는 빛도 있지만, 1차원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증오와 폭력의 상상이 독자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그림자가 있다.”(중앙선데이 2015년 5월 17일 ‘[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잔혹 동시가 남긴 빛과 그림자’)

다른 나라는
프랑스 언론사 테러와 ‘표현의 자유'

올해 1월 프랑스에선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자주 실었던 풍자신문인 ‘샤를리 에브도’가 극단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테러를 당했다. 총격으로 12명이 사망했고, 10명이 부상했다. 전 세계적으로 350만 명의 사람들이 “나는 샤를리다”를 외치며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고 ‘표현의 자유’를 웅변했다. 테러 후에도 ‘샤를리 에브도’는 마호메트에 대한 풍자를 멈추지 않았다. 이슬람권은 “마호메트에 대한 풍자는 종교적 모욕이다”고 반발했다. ‘표현의 자유’도 책임과 한계가 있다는 사회적 성찰이 제기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른 사람의 종교를 모욕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란 칼럼에서 “샤를리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순교자처럼 찬양되고 있지만 그 잡지에 실렸던 풍자만화는 증오 표현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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