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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식’ 기업가 정신도 불법으로 불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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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표재용
표재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문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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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재용
산업부장

지금도 손님으로 북적이는 멀쩡한 대형 면세점 두 곳이 늦어도 내년 상반기안에 문을 닫게 됐다. 두 면세점에서 일해온 3900여 명의 임직원은 졸지에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힘겹게 공채 관문을 뚫고 입사해 최근에 배치된 신입사원도 포함돼 있다. 단골 유커(중국 관광객)들은 “장사도 잘되고 입소문도 났는데 문을 닫는다니 대체 무슨 일이냐”며 되묻는다고 한다.

 새로 시내 면세점 운용권을 따낸 기업도 마냥 밝은 표정이 아니다. 영업권을 얻기는 했지만 대규모 투자를 해야할지 말지 주저하고 있다. 지난달 시내면세점 재허가 심사 결과가 불러온 블랙 코미디 같은 현실이다. 특정 대기업에 특혜를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시내 면세점 재허가 기한을 10년에서 5년으로 확 줄이고,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심사 기준을 적용한 첫 결과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외신들은 ‘한국 정부가 제 발등에 총을 쐈다’며 한껏 조롱을 한다. 국회와 행정부처 주변을 여전히 어슬렁거리는 규제와 재량 만능주의가 불러온 참극이다.

 법과 규제만 움켜쥐고 있으면 얼마든지 기업 군기를 잡을 수 있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관치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규제 사슬로 기업의 얼을 빼놓겠다는 가학 심리는 지방 정부도 중앙 부처 못지 않다. 세계적인 한 음료회사는 올해 말 선보이려던 탄산음료 신제품 출시를 한국에서만 기약 없이 미뤘다.

 서울시가 시민 건강을 내세워 공공 장소나 지하철 자판기에서 탄산 음료를 팔지 못하게 한 조례를 발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십년간 약수처럼 통해온 무첨가 탄산수마저 서울시 관할 자판기에서 사라졌다.

 정작 서울시는 건강에 더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주스나 다른 과당 음료에 대해선 별말이 없다. 라면업계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국민 건강 증진 명목으로 라면 등 식품에 첨가하는 나트륨을 규제하려는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김치 다음으로 나트륨이 많은 식품이 라면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시판 중인 라면의 나트륨양 평균치를 측정해 과다 여부를 표시하도록 한 게 법안의 골자다. 국회에선 라면을 시작으로 모든 식품에 해당법을 적용시키려고 벼르고 있다고 한다. 만약 이런 유의 법이 확대 적용되면 집집마다 비법 양념을 갖고 장사를 해온 전국의 맛집은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규제혁파 끝장 토론회가 네 차례나 열렸지만 현장에선 이런 식의 황당한 역주행은 되레 잦아지고 있다. 한편에선 기업들이 엑스트라처럼 동원되는 상황도 되풀이되고 있다. 여전한 전시 행정 탓이다. 스타트업(신생기업) 관계자의 전언이다. 그는 얼마전 해외 산업 박람회에 갔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활기가 넘치는 중국 부스와 달리 한국 부스는 텅빈 상가처럼 썰렁했다. 행사장 옆 호텔 커피숍에 앉아 잡담을 나누는 국내 기업 참석자들의 이야기는 더 충격이었다. “무역 관련 부처에서 참석을 요구해 마지못해 왔을 뿐 시장 개척은 별생각이 없다”는 본심을 들은 것이다. 냉온탕식 관치 행태가 반복되는 사이 한국의 기업가들은 갈수록 어깨가 처진다.

 최근 44개국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한국의 기업가 정신은 아시아(64점)권은 물론,세계 평균(51)에도 못미치는 44점을 받았다. 순위도 28위로 사실상 바닥권이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지난달 25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즈음해 그의 창발적인 기업가 정신이 어느때보다 주목받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그런 식의 도전 정신은 꿈조차 꾸지 말아야 한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규제와 더 강력해진 국회, 행정부의 재량주의에 발목을 잡힐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정 회장의 간척지 물막이 공사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물막이 공사 마무리를 위해 폐유조선을 바다에 가라앉히기라도 한다면 박수도 받기 전에 다음과 같은 법들에 얽혀 법정에 설 것이다. 선박 매몰죄(형법 제187조), 해양환경관리법 제83조의2(침몰선박 관리), 공유수면관리법 제6조(방치된 선박 등의 처리)…. 설사 이런 법들이 적용 안 되면 사법부에서 전가의 보도 인양 휘두르는 배임죄가 ‘약방의 감초’처럼 덧씌워질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은 지금 옅은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다.

표재용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