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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물려주지 못해도 모든 아버지는 영웅입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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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호 16면

박애리

또 하나의 새로운 창극이 탄생한다. 지난 9월 판소리 ‘적벽가’를 모던하게 재해석해 호평받았던 국립창극단이 연이어 내놓는 신작이다. 2013년 그리스 비극 ‘메디아’에 소리를 입혀 오페라처럼 웅장한 무대로 빚어냈던 서재형 연출?한아름 작가 부부의 두 번째 창극 도전이다. 한 작가는 계유정난 때 단종을 유배지로 호송하고 사약까지 전했던 의금부도사 왕방연의 존재에 상상을 더해 전혀 새로운 ‘남자의 비극’을 직조해 냈다. 아무 원전도 없는 완전 창작물 ‘아비. 방연’(11월 26일~12월 5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소리를 입힌 것은 소리꾼. 1999년부터 16년간 국립창극단에 몸담고 있다 최근 독립한 그의 생애 최초 작창 도전이기도 하다. ‘원작 없는 창극’은 어떤 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38) 작가와(38)를 함께 만났다. ?

한아름

“‘메디아’ 때부터 작가님에 대한 마음이 사무쳤어요. 오장육부를 구석구석 찌르는 대본에 반했거든요. 뼈가 녹아날 것처럼 진을 빼는 작업이었지만 지난 16년간 기억에 남는 1순위 작품이 됐죠.” (박애리, 이하 ‘박’)


“하늘이 내려준 인연 같아요. ‘메디아’ 때 처음 만났는데 이성적이면서 직관도 있는 배우더군요. 작창을 위한 조건이 바로 이성적 판단과 작품에 대한 직관이거든요. 어린 딸을 둔 부모로서의 정서도 있고. 한번도 다른 분은 생각 안해봤어요.”(한아름, 이하 ‘한’)


“제 별명이 ‘3분 짜장’이에요. 3분 작창이죠. 아이한테 즉흥으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서 소리로 들려주곤 하거든요. 그런데 ‘아비. 방연’ 작창은 무진장 힘드네요. 중요한 국립 작품을 망치면 어쩌나 부담감이 커서 처음엔 고사했어요.”(박)


“저희가 삼고초려를 했죠. 배우의 마음으로 참여하시라고. 혼자가 아니라 한 식구처럼 같이 만들테니 부담갖지 말라고 꼬셨어요.(웃음)”(한)


77년생 동갑내기 두 여자는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구수한 입담의 소리꾼는 모든 대화를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드라마틱하게 했고, 작가의 이야기 보따리도 만만치 않았다. 각각 5살, 3살 외동딸을 둔 엄마인 둘은 서로 공감대도 많고 할 말도 많았다. ‘88올림픽 때 몇 학년이었느냐’로 시작해 아이와 놀아주지 못하는 미안함, 비슷한 성향을 가진 완벽주의자 남편들 이야기까지, 기나긴 수다의 결론은 “우린 옆집에 살아야 된다”였다.

“소시민 아버지 덕에 우리가 있죠”“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노매라”


단종의 왕위 피탈 후의 이야기를 기록한 『장릉지(莊陵誌)』에 실린 왕방연의 시조다. 단종에 대한 애끓는 충심이 담겼다. 왕방연은 역사 속 중요한 역할을 한 실존인물이지만 단종 서거 240여년 후에 쓰여진 『숙종실록』에 단종을 유배 보냈다는 단 한줄 기록이 전부인 의문의 남자다.


“역사책 속에 숨어있는 재밌는 인물들이 많아요. 왕방연이 지은 시조만 보면 단종 편인데 그렇게 슬피 울 거면 왜 갔을까, 금부도사까지 지낸 사람이 왜 생몰미상일까, 그 지점이 궁금했어요. 분명 뭔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을거야, 기록도 누군가 지웠을 거야, 상상력이 발동했죠.”(한)


그의 상상은 ‘혼기가 찬 어여쁜 딸을 무사히 시집보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아비의 처지’로 향했다. 왕녀 메디아의 비극이 자식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비장미 넘치는 스펙터클이었다면, ‘아비의 비극’은 자식을 위해 대의를 저버려야 했던 쓸쓸한 뒷모습을 비춘다.


“단종 이야기엔 늘 사육신 영웅 캐릭터만 나오죠. 그들은 의를 택하고 영웅이 됐지만 그 뒤에 처자식은 너무나 불행했어요. 제가 뮤지컬 ‘영웅’을 썼지만 안중근의 가족도 몹시 불행했죠. 그렇다면 아버지라는 책임감 안에서 시대에 굴복한 사람을 비난해야 할까요. 우리처럼 부침많은 나라에서 그런 소시민적인 아버지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왕방연이 비록 사육신처럼 멋진 영웅은 아닐지라도 자식 위해 살아내려고 한 아버지로서 칭찬하고 싶은 거죠. 요즘 금수저 논란도 있지만 금수저 아버지만 아버지인가요. 이 시대 ‘아버지’란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이 아마 왕방연일 거예요.”(한)


한 작가는 실제로 수 년 전 돌아가신 부친을 그리며 작품을 써내려갔다. 병환 중에 입버릇처럼 “살아생전 딸 셋 시집 보내고 새끼 낳는 거 봐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라는 말을 무한 되풀이하던 부친의 마음을 자신이 엄마가 되고서야 비로소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좀 짜증스러웠죠. 나름 멋진 인생을 사신 분인데 그게 마치 대단한 훈장인 양, 오직 그 목표를 위해 인생을 달려온 것처럼 말씀하시는 걸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느지막이 딸을 낳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내가 어떻게든 건강하게 오래 살아 얘 결혼시키고 애 낳을 때까지 있어줘야 되는데’였어요. 아버지가 번쩍 떠오르더군요. 대기업 총수든지 누구든지 인생의 끝에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다 똑같을 거예요. 전에도 아버지 소재의 작품을 쓴 적 있지만 애를 낳고 보니 전혀 달라요. 이번에 작정하고 썼죠.”(한)


“판소리를 평생 공부라고 하거든요. 소릿길은 10대 때 다 익히지만 인생 경험을 안 해보고 불렀을 땐 그저 기교로 부르는 거죠. 사랑도 이별도 해보고 부모도 떠나 보내보고 아이도 낳아보고 부르는 소리는 감동이 다르거든요. ‘아비. 방연’도 마찬가지죠. 작가님 경험이 사무쳐 다를 거에요.”(박)


비극의 주인공치곤 좀 찌질한 거 아닌가 싶은데, 창극에는 이런 필부필부가 더 어울릴까요.


박: 판소리가 200년 넘게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사람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에요. 신데렐라 스토리같은 먼 나라 이야기보다는 부모고 자식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인 거죠. 심 봉사 눈뜨는 대목에서 자식이라면 누구나 눈물 흘리지 않나요. 바로 내 아비, 자식의 이야기가 우리의 원초적인 오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토해내는 소리와 만난다는 것이 창극의 매력이죠.


한: 우리 카피가 ‘난세의 영웅 아닌 아비로 살리라’거든요. 한 집안의 가장이란 건 사회적 성취도와는 달라요. 아버지란 늘 미묘한 선택의 순간에 놓일 수밖에 없고, 이 땅의 99% 아버지는 자기 신념과 개인적 야망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한 선택을 하죠. 철이 든다는 건 평범한 우리 부모의 인생도 결코 만만치 않았구나, 우리 아버지도 영웅이구나를 깨닫는 일인 것 같아요.


요즘엔 아버지의 희생을 강조하면 영화 ‘국제시장’처럼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비판받는데요.


한: 가장 숭고한 가치를 어떻게 자기 편의대로 정치적 잣대를 대고 이리저리 평가할 수 있나요. ‘국제시장’을 쓴 박수진 작가는 오히려 성향이 왼쪽인데 정반대로 몰렸죠. 자기 가슴을 열어젖히고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군요(웃음). 아버지와 자식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봐주세요.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효’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박: 자식을 위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느냐는 마음은 어떤 부모든 같으니까요. 예전에 딸을 죽인 살인자가 가볍게 풀려나자 법이 벌하지 않겠다면 내가 벌하겠다고 나선 아버지에 관한 뉴스가 있었어요. 우리 남편도 자기라도 그러겠다더군요. 내 인생 어떻게 되도 지구 끝까지 쫓아가겠다, 이게 모든 부모 마음일 거예요.

각자의 설움 표현 위한 음악적 실험지난 여름 오랜 세월 몸담았던 국립창극단을 나와 ‘따끈따끈한 백수’가 됐다는는 퇴단 이유를 묻자 “다 때가 있다”고 답했다. 스물 셋에 입단해 수많은 무대에서 운과 기회를 한껏 누렸다는 것이다. “후배들도 때가 있잖아요.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역할도 있지만 그걸 쥐고 있는 게 욕심 같았어요. 남편의 응원도 힘이 됐고요. 예술가에게 쳇바퀴돌 듯 여유없는 삶이 좋지만은 않다, 건강부터 챙기라는 거였죠. 근데 백수가 이렇게 바쁜지 몰랐네요. 당장 ‘아비. 방연’ 때문에 주말도 못 쉬고 있어요.(웃음)”(박)


작곡가와 가수가 다르듯 작창자와 소리꾼도 다르지 않나요.박: 해외 공연을 가는 비행기에서 처음 대본을 읽으며 엉엉 울었어요. 끝까지 못 읽을 정도로요. 대본만 봐도 이런데 우리 음악이 더해진다면 어떨까 싶었죠. 작창이라는 게 글을 보고 소리꾼이 감성을 적용시키는 거예요. 소리꾼들에겐 수많은 소릿길이 있고, 같은 선율이라도 밀고 당김에 따라 천변만화하죠. 그런데 기존 창극은 작창 따로, 작곡 따로 하다보니 오히려 소릿길이 다 비슷하게 들리곤 해요. 이 작품은 황호준 작곡가와 긴밀한 협업으로 만들고 있어서 작창과 작곡이 적절히 어울린 새로운 무언가가 나올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 새로운 시도도 있나요.박: 판소리 5바탕은 금세 웃겼다 울렸다 교차되니까 계면조·우조·평조 등 늘 쓰는 선율의 길이 있죠. 그런데 이 작품은 각자 원통함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울음을 울어요. 아비와 딸, 어린 왕이 각자 다른 맘으로 우니까 같은 계면조로 할 수 없어요. 그래서 판소리에 잘 등장하지 않는 음들을 소리적인 느낌으로 살리고 있죠. 우리 음계는 ‘궁상각치우’니까 ‘파’와 ‘시’가 잘 없는데, 그걸 곳곳에 표현하려고 해요. 시대물인 듯 보이지만 지금 이야기인 것처럼 옛날 소리에 지금의 음계를 가져와 소리적인 느낌으로 살려보려는 거죠.


한: 기존 5바탕이 소리를 듣기 위해 극을 즐겼다면, 이번엔 극을 전개하기 위해 대사와 소리, 음악이 맞물려 돌아가는 방식 자체가 새로운 느낌을 줄 것 같아요. 작업방식 자체가 다르니 결과물도 다르겠죠.


박: 새로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즐기시게 될 거예요. 이야기가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음악으로 들리다 때로는 그림으로 보이는 그런 무대가 될 겁니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국립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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