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숭숭한 내년 전망 … 진짜 위기는 몸사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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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왼쪽 셋째)는 17일 대한상의 조찬간담회에서 세계경제 불안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다음달 금리를 올릴 것으로 전망했다. 이동근 대한상의 상근 부회장,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 이 총재,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왼쪽부터)이 간담회장으로 가고 있다. [뉴시스]

삼성물산 건설부문 이모(43) 차장은 요즘 눈뜨자마자 스마트폰으로 삼성 기사부터 찾아본다.

전경련, 285개 기업 조사 … 성장보다 경영 내실화 우선
불황·실적부진 이어지자
구조조정·인력감축 몰두
이주열 "미 금리 내달 올릴듯"

 하루가 멀다 하고 구조조정 얘기가 나오는 터라 시간만 나면 삼성 관련 뉴스를 모니터링하는 게 일이 됐다. 부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는 것도 찜찜하다. 그는 “정년까지 10년 이상 남았는데 퇴직 압박을 받을 줄은 몰랐다”며 “퇴직 후 일자리를 알아보는 동료가 부쩍 늘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현대중공업에 20년 넘게 다닌 박모(50) 부장 역시 주변에서 “괜찮으냐”는 소리를 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선다. 지난해 회사가 3조원대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3분기까지 1조261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전체 사무직의 15%인 1500명이 명예퇴직했다. 구조조정이 한창인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그의 최대 관심사다. 그는 “회사가 내년도 경영 플랜을 짜기는커녕 어두운 얘기만 쏟아져 나와 힘이 빠진다”고 털어놓았다. 내년도 사업계획을 본격적으로 점검하는 시기지만 재계는 어느 때보다 어수선하다.

 전 세계적인 불황이 몇 년째 이어지는 데다 특히 올해엔 정부의 부실기업 퇴출 움직임에 조선 ·해운 등 특정 업종의 구조조정 및 사업 재편설까지 맞물리면서 큰 기업들조차 사실상 손을 놓은 곳이 적지 않다. 중소기업도 사정은 크게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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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감독원이 올해 중소기업의 신용위험도를 평가한 결과 재무구조가 취약한 중기 1934개 중 구조조정 대상이 175개로 나타났다. 지난해보다 50개 늘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512개) 이후 최대치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경기 불황이 일상화하면서 기업의 실적 부진이 여전한 데다 ‘파리 테러’까지 겹쳐 재계가 어느 때보다 어수선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더욱 심상치 않은 것은 움츠러든 기업들의 심리다. 17일 전경련이 매출 상위 600대 기업 285곳을 설문한 결과 절반 이상의 기업이 “내년도 기업 매출이 올해와 같거나 악화할 것”이라고 점쳤다.

 이런 전망 탓인지 기업의 ‘몸사리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전경련 조사에서 기업의 내년도 사업전략 1순위는 ‘구조조정을 비롯한 경영내실화’(41%)로 나타났다. ‘시장점유율 확대’(31%)나 ‘연구개발(R&D) 등 성장 잠재력 확충’(14%)은 뒤로 밀렸다. 물론 대내외 여건은 호의적이지 않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17일 기업 최고경영자(CEO) 조찬간담회에 참석해 “글로벌 경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12월에 기준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높다”며 “내년에 3% 수준의 경제 성장을 예상하지만 기업인 여러분이 기대하는 급속한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그러나 뒷걸음치는 경영으로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 교수는 “전자·조선·자동차 등 한국의 주력사업은 수많은 협력업체를 거느리고 있는 게 특징”이라며 “주요 기업들이 ‘방어 경영’에만 쏠리게 되면 국가 경제 전체가 가라앉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앞장서 신성장 동력에 투자하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짜야 할 대기업이 구조조정과 인원 감축에만 몰두하면 경제 전반에도 큰 타격을 줄 것이란 얘기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지난 9월 미국에서 열린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CGI)’ 행사에서 “진짜 위기는 과도한 위기론에 매몰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현대건설의 중동 진출,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등은 당시엔 모두가 말렸던 도전이었지만 지금은 해당 기업은 물론 한국 경제의 초석을 다지는 밑천이 됐다. 최근에도 한미약품은 성공률이 0.02%에 불과한 신약 개발에 꾸준히 투자한 끝에 5조원이 넘는 기술 수출이란 쾌거를 이뤘다.

 곽수근 서울대 경영학 교수는 “혁신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기업은 위기를 감수하는 과감하고 꾸준한 투자 끝에 우뚝 선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박찬희 교수는 “경제위기가 장기화하면서 시장에 우수한 인력과 탄탄한 기술력을 갖춘 회사가 넘쳐난다”며 “기업가 정신을 갖고 R&D 투자와 적극적인 채용, 인수합병(M&A)에 나선다면 ‘퀀텀 점프(비약적 발전)’하는 반전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남현·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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