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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좀 싱거워서 … 007, 길을 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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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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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번째 007 시리즈인 ‘스펙터’에서 6대 제임스 본드로 활약 중인 대니얼 크레이그. [사진 UPI코리아]

역대 최대 제작비 3억 달러(약 3400억원), 최장 상영시간 148분, 시리즈 최고 흥행작인 ‘007 스카이폴’(2012, 이하 ‘스카이폴’)의 샘 멘데스 감독과 각본가 존 로건의 재회까지. 11일 개봉하는 ‘007 스펙터’(이하 ‘스펙터’)는 표면적으로 성공의 조건을 다 갖춘 영화로 보였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막상 총구를 들여다 본 ‘스펙터’는 규모에 이야기가 짓눌린, 지루한 작품이 돼버렸다. 지난 7월 탄탄한 이야기로 돌아왔던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과 비교되는, 안타까운 귀환이다.

24번째 시리즈 ‘스펙터’ 11일 개봉
본드의 어릴 적 트라우마 공개
유려한 영상보다 식상함 아쉬워

 스물네 번째 007 시리즈인 ‘스펙터’는 6대 제임스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의 네번 째 작품이다. 그가 주연한 ‘007 카지노 로얄’(2006)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 ‘스카이폴’을 아우르는 이야기로, 그동안 본드를 괴롭혀온 거대 악당 스펙터의 정체를 공개하면서 크레이그 시대를 갈무리하는 작품이다. 특히 ‘스카이폴’에서 본드에게 인간적 고뇌를 안겨주며 영웅의 몰락을 깊이 있게 그려냈던 멘데스 감독이 “본드의 부활을 선언”한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는 예의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액션 장면으로 시작된다. 본드는 축제가 한창인 멕시코시티 한복판에서 곡예 비행 중인 헬기에 올라타 악당과 박력 넘치는 육탄전을 벌인다. 도심의 반을 날려버린 이 사건으로 본드가 속한 영국 정보국 MI6는 해체 위기에 놓인다.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한 본드는 일단 전 세계 곳곳을 돌며 스펙터의 실체를 찾는 데 주력한다. 설원과 사막을 오가며 악당을 쫓는 영화의 중반까지는 ‘인터스텔라’의 촬영감독이었던 호이테 반 호이테마의 촬영으로 우아하고 장중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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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 받는 배우 레아 세이두가 신작의 ‘본드 걸’로 출연했다.

 문제는 중반 이후다. ‘스펙터’는 가장 탄력을 받아야 할 시점인 스펙터의 등장에서 기세가 풀썩 꺾인다. 사상 최대 악당으로 광고했던 오버하우저의 범죄 동기가 유아적인 데다, 그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왈츠의 카리스마가 크레이그에게 역부족이라 그 대결이 싱겁다는 인상이다. ‘스카이폴’에서 본드를 위협했던 실바(하비에르 바르뎀)의 존재감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럽다. 가장 치밀했어야 할 오버하우저와의 액션 대결이 되레 허술하게 설계된 것도 작품의 밀도를 떨어뜨린다.

 허약한 악당은 제쳐두고 본드의 내면으로 관심을 돌려봐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다. 본드와 MI6는 “007을 드론으로 대체하라”는 시대의 압력에 직면한다. 첨단 무기가 군인을 대체하는 시대, 냉전이 종식된 시대에 살인 면허를 가진 스파이의 존재는 분명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펙터’가 하고있는 이야기는 이미 몇 달 전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서 멋지게 풀어낸 것이었다. 시리즈 최초로 본드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공개하며 이야기를 확장하려 했으나, 그 기시감을 극복하기엔 숨이 찼다.

 크레이그의 본드는 역대 본드들이 쌓아온 유머러스하고 능글맞은 능력자 스파이와는 달랐다. 절대악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들어맞는 고뇌하는 인간이었다. ‘스펙터’를 끝으로 007은 크레이그 이후의 ‘새로운 본드’를 보여줘야 할 숙제를 남겼다.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 5개 만점, ☆는 ★의 반 개

★★(나원정 기자): 악당은 카리스마를 잃고, 제임스 본드는 명분을 잃었다. 치밀한 스토리 없이 규모만 요란해진 첩보 액션. 명품으로 휘감은 비주얼로만 버티기에 148분은 너무 길다.

★★★(지용진 기자): 메가톤급 액션을 쏟아낸 대니얼 크레이그는 건재했다. 위트와 멜로도 이야기 곳곳에 조화롭게 녹아있다. 다만 영화의 다양한 배경이 외려 산만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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