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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1995)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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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24면

1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네트워크가 자의식 갖게 된다면?인간의 존재 이유와 가치는 뭘까

오시이 마모루 감독

19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이자 SF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공각기동대’는 2029년이라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벌써 20년 전에 선을 보였던 이 작품은 2029년에 가까워지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예언서 같다.


‘공각기동대’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공안9과는 네트워크와 현실의 테러 진압이 주된 임무다. 임무 수행 중 정체불명의 해커 ‘인형사(The Puppet Master)’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고, 쿠사나기를 포함한 공안9과의 요원들은 인형사를 추적한다. 인형사는 네트워크를 종횡무진하면서 정보를 빼내고 교란시킨다. 심지어 사람들의 뇌에 가짜 기억을 집어넣어 자신의 수하로 만들기까지 한다. ‘인형사’라는 이름 자체가 사람들을 마치 인형처럼 조종한다는 뜻에서 붙은 별명이다. ‘공각기동대’는 네트워크와의 전쟁을 배경으로 삼는다.

2 쿠사나기 소령.

사이보그 몸 빌려 행동하는 프로그램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현대 사회에서 네트워크의 사건들이 심각한 현실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해킹은 물론이고 정보의 조작과 세탁이 오늘날 중요하게 취급되어진다. 각종 클라우드 서비스는 네트워크상에 자료와 기억을 저장함으로써 ‘공각기동대’에 등장하는 청소부처럼 누구든 자신의 기억을 해킹당할 수 있는 현실에 이르고 있다. 데이터는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빅데이터 이론은 각종 데이터 분석을 통해 인간의 행동 패턴과 소비 패턴을 추론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빅데이터에서 뽑아낸 결론이 진정한 인간의 행동 패턴 혹은 소비 패턴인지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개인을 데이터상의 좀비로 치환할 뿐이다. 네트워크나 정보이론은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에 부딪힌다.


‘공각기동대’의 관심사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물린다. 공안9과의 행동 대장인 쿠사나기는 뇌의 일부만 인간이며 나머지는 기업에서 제작한 사이보그다. 그녀는 인형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인형사가 인간이 아니라 ‘프로젝트 2501’이라 불리었던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형사 혹은 프로젝트 2501은 한 사이보그 인체에 들어가(이렇게 주입되는 과정을 ‘고스트ghost’라고 부른다)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한다. 인간은 아니지만 네트워크 속에서 자의식을 지니게 된, 생명체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생명적 존재임을 주장한다. 사이보그의 신체를 빌어 활동하던 쿠사나기는 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뇌의 일부만 존재하는 자신을 과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자신과 인형사와의 차이는 무엇인지 등. 그녀는 마침내 인형사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리고 인형사와 융합하여(일종의 결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네트워크상의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다.

3 공각기동대의 마지막 장면. 새로운 세상의 탄생을 암시하고 있다.

신세계의 탄생 예고한 미래 선언문지난해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가 여자 목소리를 내던 프로그램과 사랑에 빠진 한 인간 남자의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다루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 영화도 프로그램이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더 넓은 세상인 네트워크로 떠나며 끝이 난다. 스칼렛 요한슨이 목소리 연기를 한 영화 속 ‘프로그램’은 쿠사나기의 소프트한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각기동대’는 훨씬 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다. 인형사가 주입된 신체를 둘러싸고 박물관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이 작품의 절정이다. 박물관 벽면에는 생명의 계통도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쏟아지는 총탄에 의해 파괴되는데, 이는 인간을 진화의 정점으로 그려놓은 계통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사이보그의 몸을 통해,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면서 새로운 계통수를 그려나갈지도 모르는 지점에 서 있다. 이러한 결론은 ‘공각기동대’가 사이버 세계를 통한 저항과 새로운 주장을 펼쳐놓는 ‘사이버 펑크’ 계열 작품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이버의 세계에서 고전적 의미의 국가나 영토는 무의미하다. 신인류는 더 이상 고전적인 영토, 주권, 신체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간다. “이제 어디로 갈까. 네트는 방대하거든”이라는 마지막 대사는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위한 미래의 선언문이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인간이 한낱 기계와 다를 수 있는 건?불안 속에서도 희망을 품기 때문

오시이 마모루(押井守·64) 감독은 실험적인 영상과 철학적인 내용으로 단단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1983년 ‘우르세이 야츠라’로 애니메이션 감독에 데뷔한 그는 시로 마사무네(士郞正宗)의 원작 만화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구현한 ‘공각기동대’로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거장 반열에 올랐다. 프랑스 영화감독 뤽 베송은 이 작품에 경의를 표하며 자신의 영화 ‘제 5원소’(1997)에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을 오마주했다.

불행한 남자가 있다. 누군가로부터 머리를 해킹당한 것이다. ‘인형사’로 불리는 어떤 존재가 이 남자의 두뇌에 기억을 주입했다. 아내와 딸에 관한 생각, 그리고 외도와 별거에 대한 기억도 모두 가짜다. 이 불행한 남자는 인형사가 주입한 기억에 따라 움직이며 심부름꾼 노릇을 했던 것이다. 정부 당국에 붙잡힌 남자는 모든 전모를 듣고는 억지로 주입된 기억을 제거할 수 없느냐고 절규한다.


위의 일화는 ‘공각기동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누군가 당신의 뇌를 스캔할 수도, 기억을 주입할 수도 있다. ‘공각기동대’는 앨런 튜링이 예언했던 ‘생각하는 컴퓨터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묘한 당혹감에 빠져들며 의심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 남자처럼 나의 기억이 실은 누군가가 주입한 가짜가 아닐까, 하고.


기계와 인간의 구분 모호한 존재영화는 정보요원 쿠사나기가 인간의 뇌든 컴퓨터의 CPU든 자유자재로 해킹하고 다니는 인형사라는 존재를 추적하는 줄거리로 진행된다. 문제는 쿠사나기라는 여자 자체가 기계인지 인간인지 경계가 흐릿하다는 점이다. 인형사의 등장으로 쿠사나기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한다. 그녀는 동료에게 당혹감을 고백한다.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주변 상황을 보고 ‘나’다운 게 있다고 판단할 뿐. 만약 전뇌가 고스트를 만들고 거기에 혼을 넣는 거라면, 무슨 근거로 자신을 믿지?”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쿠사나기는 인형사를 잡으려는 임무에 더 집중한다. 인형사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에 관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를 거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사이엔가 이 프로그램, 즉 인형사가 자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 “나는 나다”라는 자의식은 “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낳게 마련이다. 이 생존에의 의지로 프로젝트2501은 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활동하는 하나의 인격체로 형상화된다. 바로 이것이 ‘인형사’의 정체였던 것이다.


인형사 또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쿠사나기를 찾았다. 왜냐하면 쿠사나기의 정신과 자신의 프로그램을 결합하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녀는 섹스를 통해 새로운 후손을 낳고, 후손을 통해 자신들이 가진 생명정보(DNA)를 안전하게 미래로 전한다. 인형사가 갈망했던 것도 이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인형사의 프로그램과 쿠사나기의 기억은 새로운 관계로 결합되어 지양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지양은 ‘보존과 극복’이란 의미를 동시에 지닌 헤겔의 변증법적 지양(Aufheben)이다.


인간보더 더 인간적일 수도 있는 기계얼핏 ‘공각기동대’는 인간의 정체성을 기억에서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 불행한 남자도 두뇌에 주입된 기억에 따라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꿈꾼다. 만약 이런 논리가 옳다면, 우리 인간은 고도로 발달된 기계, 즉 컴퓨터와 구별될 수 없다.다행스럽게도 감독은 인간의 정체성이 기억에만 따른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억 이외에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일까. 바로 자신을 극복하고 다른 자기로 나아가려는 의지! 즉 자기 극복에의 희망이다. 기억의 일방적인 지배가 아니라 ‘새로운 나’로 거듭나려는 ‘불안한 희망’이 아니라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4 잠수한 쿠사나기는 수면에 비친 자신을 보며 사이보그와 인간 사이의 존재인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사진 마티]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공각기동대’의 아이러니와 직면한다. 그것은 사이보그였던 쿠사나기나 한낱 프로그램에 불과했던 인형사가 더 인간적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기억에 따라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인간의 몸을 지녔지만 사실 기계에 가깝지 않을까. 반면 자신의 기억을 극복하고 불안하더라도 미래를 꿈꾼다면, 그것이 기계이든 프로그램이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지 아니한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 새로운 존재로 응결되는 것, 들뢰즈는 이것을 ‘생성’이라 이름 붙였다. 영화는 이미 20년 전에 인간이냐 기계냐, 라는 거친 이분법을 새롭게 재편해낸다. ‘생성을 긍정하는가, 아니면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생성을 긍정할 때, 우리는 확고한 기억만이 아니라 불안한 희망도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강신주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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