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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가방보다 보자기다, 이어령의 문명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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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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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보자기 인문학
이어령 지음, 허숙 옮김
마로니에북스
448쪽, 1만5000원

‘쌀 것이냐, 넣을 것이냐.’ 이어령(82) 초대 문화부장관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문명사적 질문이다. 보자기로 싸는 문화와 가방에 넣는 문화, 보자기형 가변조직과 가방형 관료조직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정보화 사회에서 앞서가는 관건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창조의 아이콘’이자 혜안의 문명사가인 이 전 장관이 30여 년 품어온 보자기 인문학을 내놓았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비교론을 써달라는 일본 ‘중앙공론’사의 제의로 1989년 펴냈던 일본어판의 번역본이다. 『가위바위보 문명론』과 같이 우리의 풍습 속에서 찾아낸 포스트모던 문화론으로 오래된 미래를 되살려낸다. 펼치면 2차원 평면이요, 싸면 3차원 입체가 되는 보자기의 포용성·융통성·가변성을 변신로봇에 비유해 미래를 예언했다.

 “이 책은 우리의 의식과 함께 성장해온 ‘옛것의 시학(詩學)’이며, 거창하게 말하면 물건을 기호로 바꿔 미지의 문명을 읽어가는 ‘독서법’이기도 하다.”(13쪽)

 ‘젓가락’의 메시지도 신선하다. 한 짝 만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젓가락의 존재이고 기능이기에 젓가락 문화권에서는 사람을 인간(人間),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배려를 전제로 하는 젓가락, 제대로 배워야 사용할 수 있는 젓가락이야말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다리 구실을 한다. 이것이 아시아인으로 사는 행복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앞으로부터 267쪽까지는 횡체 한글판, 뒤로부터 178쪽까지는 종체 일어판으로 두 언어로 읽을 수 있는 합본이다. 한·중·일 삼국이 가위바위보처럼 3항 순환으로 엮여야 살아갈 길이 열린다는 노학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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