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뜨거운 동북아 에너지 안보 전쟁] "러시아 파이프라인 노선 쟁탈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동북아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뉴욕의 무역센터를 주저앉힌 9·11 테러와 이라크전 이후 더욱 거세졌다. 문제의 핵심은 러시아의 사할린과 이르쿠츠크,시베리아에 있는 석유와 가스의 파이프 라인이다. 미국·일본·중국의 정상들까지 거들고 있다.

장기적으론 북핵해법의 수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학술진흥재단과 러시아 지역연구사업단(단장 권원순 한국외대교수)이 ‘동북아 지역에서의 에너지 안보와 협력’에 관한 국제학술대회를 22일부터 사흘간 연다. 이 대회에서 발표되는 중요 논문을 요약하고 동북아 에너지 안보협력의 가능성과 전망을 점검해본다.

동북아의 에너지 안보 각축전은 중국과 일본이 선도하고 있다.

러시아.중앙아시아의 가스와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둘러싼 싸움이다.

중국은 석유수입량 증가율에서 세계 1위다. 현재의 수입량에선 일본이 1위다. 한국은 수입량 4위다. 문제는 이들 세 나라의 역내 에너지 의존도가 사실상 0%에 가깝다. 중동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베리아와 사할린이라는 역내 공급지를 놓고 경쟁을 시작한 것이다.

사할린과 이르쿠츠크 지역에 대한 투자를 진행한 엑슨모빌.BP.셸 등 미.영의 석유재벌도 동북아의 신 에너지 수급구조망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은 북한 핵문제의 해법과 연계해 시장지배력을 키워가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각국의 이 같은 각축을 시베리아의 세계화에 활용하는 한편 동북아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하고 나아가 이를 항구화하겠다는 복안이다.

알렉산드르 일리인스키(상트 페테르부르크 광산대) 교수는 "러시아는 9.11 이후 단순한 판매확대 전략에서 탈피해 1차적으로는 액화천연가스(LNG) 형태로라도 물량을 늘려 러시아에 대한 외국의 에너지 의존도를 늘리고, 2차적으로는 파이프라인 건설 등을 통해 장기적인 공급기반을 구축한다는 전략으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스티븐 화이트(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수는 "동북아시아에서 이미 에너지 안보전쟁이 시작됐다"며 "동북아 중심국가 전략을 추진하는 한국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한번 형성된 구조는 향후 수십년 이상의 역학관계를 규정지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화이트 교수는 학술진흥재단 등이 주최하는 '동북아 에너지공동체 형성 가능성과 러시아의 21세기 전략'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 중이다.

중국은 동북아의 에너지 안보라는 측면에서 지금까지 가장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누구보다 앞서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 연방국가들과 파이프라인 건설 및 에너지 관련 협정을 맺어왔다.

일본은 중국의 독점적 지배력을 방지하고자 장기 공급물량을 보장하는 방법 등을 내세워 맹렬한 추격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도 새로운 질서형성에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굳다. 동북아 각국이 에너지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선 어떤 형태로든 한반도와 얽혀야 한다. 한국은 사할린 가스와 이르쿠츠크 가스의 주요한 시장이자 통과지다.

따라서 한반도의 정치적 안정이 필수적이며 이들 지역의 가스를 운송할 파이프라인이 한반도의 어느 지점을 통과해야 할 것인지가 중요한 변수다.

최근 사할린 파이프라인 건설문제가 떠오르면서 보이고 있는 셸과 엑슨모빌의 신경전, 앙가르스크 송유관 부설의 루트를 놓고 벌인 중국과 일본의 외교전은 이러한 경쟁의 한 단면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직접 나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상대로 외교전을 벌였다. 그 결과 앙가르스크 송유관을 다칭(大慶)까지 연결하기로 확정했다.

1차전에선 중국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하지만 지난 20일 푸틴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 러시아는 여전히 일본이 제안한 나홋카 노선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누가 진정한 승자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중국은 이르쿠츠크 가스관의 북한.몽골 통과도 반대하고 있다.

한국은 동북아국가들의 이 같은 에너지 안보외교에 일견 무심해 보인다. 그러나 주변국에선 이미 21세기 역내 신질서 형성을 염두에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 지역연구사업단장인 한국외대 권원순 교수는 "러시아가 석유.가스 파이프라인과 전력망.철도 등을 전략적.복합적으로 활용해 미국과 중국의 에너지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최대한의 실리를 취하려는 정책으로 전환했다"며 "한국의 면밀한 대응이 시급한 때"라고 말했다.

김석환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