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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목소리 크면 다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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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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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아내는 몇 년 전 빵집을 했다. 종로에 프랜차이즈를 차렸다. 종로는 임대료가 무척 비쌌다. 빵 한두 개 팔아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 초기엔 인건비 아낀다며 가끔 잡일을 거들었지만 내가 도와준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사달이 난 건 2년쯤 지나서였다. 근처 보석상 주인이 샌드위치를 하나 사갔다. 3500원짜리다. 그는 하루 종일 샌드위치 하나만 먹었다고 했다. 그것도 종업원과 딸, 셋이 나눠 먹었다고 했다. 그러곤 셋 다 장염으로 입원했으니 틀림없이 빵이 문제라며 입원비와 보상금, 샌드위치 값을 물어내라고 했다.

 샌드위치는 매일 아침 20개만 만든다. 나머지 빵을 사간 19명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내는 무척 속이 상했다. 말이 안 되지만 “빵값만 물어주겠다”고 했다. 보석상 사장님 목소리가 커졌다. “주인 나와. 장사하려면 제대로 해.” 그는 급기야 종로보건소에 신고했다. 보건소 담당자는 “아, 왜 시끄럽게 해요. 무조건 민원인 조용히 시키세요”라고 했다. 보석상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너무 억울하다며 아내는 버텼다.

 그러자 보석상은 연일 보건소를 닦달했다. 소비자원에도 신고했다고 했다. 소비자원 강북지사라며 전화가 왔다. “이런 민원이 들어왔는데 조사 나가겠다”고 했다. 보건소는 한술 더 떴다. “민원인 조용히 안 시키면 조치하겠다”더니 바로 위생검열을 나왔다. 결국 프랜차이즈 본사가 나섰다.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시끄러워지면 더 안 좋다고 했다. 병원비와 보상금까지 50만원을 물어줘야 했다. 억울하고 분해서, 자존심이 상해서 아내와 나는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화가 나고 치가 떨린다.

 얼마 전 직원 두 사람을 무릎 꿇리고 폭언한 인천 신세계백화점 스와로브스키 사건은 떨쳐버리고 싶던 내 기억의 한 조각을 들춰냈다. ‘보석상 사장님’과 ‘스와로브스키 갑질 모녀’ 사건의 본질은 같다. ‘목소리만 크면 다 되는 세상’이 그것이다. 스와로브스키 모녀는 산 지 7년이 지나 이 빠진 물건을 공짜로 고쳐달라고 했다. 직원은 규정대로 “안 된다”고 했다. 딸이 나섰다. 본사에 전화해 고함을 쳤다. 본사는 “(시끄러우니) 그냥 (수리) 해주라”고 했다. 딸은 기세가 올랐다. 직원에게 더 진상을 떨었다. ‘결국 혼나고 해줄 걸 왜 버텨, 힘도 없는 게’ 이런 심사였을 것이다. 급기야 직원들은 무릎까지 꿇어야 했다. “목소리 큰 진상에겐 그냥 져주라”는 본사 지침만 없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갑질·진상은 왜 끊이지 않는가. 고함 앞에 규정과 법이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진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들, 매출이 떨어진들 감수하면 그만이다. 스와로브스키 측은 처음부터 당당했어야 했다. 뒤늦게 직원 피해, 법적 검토 운운해봤자 ‘가오’만 더 구길 뿐이다. 물론 물러선 기업도 핑계는 있을 것이다. “X가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한다”며 위안할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사실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다. 그 똥에 내 손이 더러워질까 봐, 귀찮고 성가실까 봐, 직장에서 불이익이라도 받을까 봐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목소리 작은 내 직원, 내 이웃의 삶은 찢기고 쪼그라든다. 이게 정글과 뭐가 다른가.

 나는 스와로브스키와 종로보건소, 프랜차이즈 빵집 본사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 규정과 법에 앞서 ‘좋은 게 좋은 거’가 이겼을 것이다. 어차피 세상사가 다 그런 것 아닌가.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버텼어야 했다. 목소리 큰 갑질들과 한판 맞짱 떴어야 했다. “세상은 목소리 크면 다가 아니다, 목소리 클수록 되레 손해다”라고 일러줬어야 했다. 그래야 규정과 법과 도덕과 양심을 지킨, 목소리 작은 이들이 억울하지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비겁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빵집을 지켜주지 못했다. 보건소 위생검열이 무서웠고, 프랜차이즈 본사가 해코지당할까 걱정됐던 것이다. 아내는 빵집을 지난해 접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이런 글을 쓰는 것이다. 늦었지만 아주 많이 늦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