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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사회의 건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50호 26면

일러스트 강일구

외래 진료를 다니던 환자가 피곤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환자의 눈 주변이 빨개졌다. 그는 “아이가 임원을 맡아서 회장엄마 역할을 잘 해보려는데 여러 엄마들 사이에서 너무 힘들고 지쳐요”라고 했다. 당사자인 아이도 아닌 엄마가 왜 힘들다는 것일까. 부모의 역할을 바라지 않았을 학교 입장에선 좀 황당한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엄마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학급임원 아동의 엄마가 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이 꽤나 있다고 했다.


아이와 부모, 특히 엄마가 함께 학교에 다니는 시대가 됐다. 학교에서 모둠을 만들어 숙제를 내주면 엄마들의 SNS 대화방에선 엄청난 수준의 대화가 오간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수학을 좋아하고 잘하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엄마들이 태교 삼아 어려운 수학문제를 푼다고 보도한 기사를 읽었다. 이 가설은 또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얼마 전 비만 관련 강의를 갔다가 우연히 앞 시간의 강의 뒷부분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강의 슬라이드가 넘어갈 때마다 연신 터지는 엄마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는 특종 취재 현장을 방불케 했다. 강의 주제는 ‘자기주도형 학습과 자기소개서 쓰기’였다. 강의의 앞부분은 좀 다른 내용이었을 수 있겠지만 ‘엄마주도형 학습’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못 채운 봉사점수는 어디서 어떻게 쉽게 채울 수 있는지가 강의 내용이 되는 현실, 그런 봉사활동을 해서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을 간 아이들이 리더가 되는 미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 씁쓸했다.


혹자는 이런 현상을 만든 엄마들이 한심하다고 평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엄마들만의 문제인가.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의 입장이 되어 보면, 얽힌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아주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안다. 내 자식을 잘 키우고 싶다는 부모의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잘 키우기’는 좀 더 고민해 볼 일이다. 소아비만 문제를 얘기할 때 부모가 바뀌는 것 못지않게 사회가 바뀌어야 하고 국가적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교육열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서야 겨우 이해할 만큼 복잡하고 수시로 바뀌는 교육제도, 다른 아이들이 다 다니니 불안해서 보낸다는 학원들, 자신이 대학 진학을 할 때보다 더 열심히 쏟아 붓고 적절한 응답이 있기를 바라는 부모, 그로 인한 심리적 부담을 과중하게 느끼는 아이들. 이것이 우리가 처한 교육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 체육 교육과 영양 교육의 활성화니 정신보건이니 하는 얘기들이 귀에나 들어올까.


의사인 내가 이런 사회적 문제를 얘기하는 이유는 이런 현상이 사회 구성원의 건강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아이들과 그 부모의 정신적·신체적 상태는 그 아이들이 사회를 이끌어 갈 머지않은 미래의 건강 문제와 직결된다. 조금 더디더라도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시간을 주자. 그리고 가끔은 멍하게 앉아서 자기 나름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볼 수 있는 여유가 함께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깨닫고 진정한 자소서를 쓸 수 있을 것 아닌가. 이런 말을 하는 학부모가 ‘현실감 없고 대책이 없는 사람’이 아닌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박경희한림대 성심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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