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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9. 巫俗으로 본 전통문화의 明暗-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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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양식 근대화 이후 압박을 가장 많이 받아 온 전통 가운데 하나가 무속(巫俗)입니다. 근대성을 비판하며 각종 전통문화를 재조명하는 분위기 속에서 무속은 재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근대성의 성과를 얼마만큼 인정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갈립니다. 근대성 그 자체를 비판하는 박노자 교수는 일제시기 일제 당국은 물론 좌.우파 지식인 모두 '미신 타파'에는 한 목소리를 냈다면서, 근대가 배제해 온 가치들에 무속도 포함하려고 합니다.

반면 허동현 교수는 공동체의 안정에 기여했던 무속의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신'을 '타파'했던 행위를 비판만 할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개화기에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무속신앙을 한국 민중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영국인인 비숍(1831~1904)여사는 "무속의 정신이 몽매한 대중들 특히 여성들을 완전히 구속하고 있다.…마귀들이 조선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기에 마귀와 통하는 무속인들에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Korea and Her Neighbours'.1898)고 했습니다.

물론 외국인들이 비판한 무속 신앙의 기복성과 주술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무속 의례들이 공동체의 안정과 합심 그리고 갈등 완화 등에 기여한 사실 역시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굿판의 종교적 카타르시스 속에서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사이의 불신과 미움이 극복되기도 합니다.

또한 무속의 세계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몇 안 되는 영역이기도 했습니다. 에로티시즘과 풍자, 신비적인 개인 체험이 깃든 무속 의례들은 엄숙한 유교 의례들과 좋은 대조를 이룸으로써 조선의 문화적 일상을 보다 다양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선의 유교 관료들은 무속이 민중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음사(淫祀) 탄압의 명분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묵인하거나 적절히 이용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물론 고종 치하에서 진령군(眞靈君) 이씨와 같은 민비 계통의 무녀들이 수회(收賄)에 연관돼 관민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왕정의 별기은(別祈恩)과 같은 무속 의례는 궁중과 민중 사이의 문화적 간극을 좁히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성리학적 배타성으로 유명한 조선의 사대부들도 어느 정도 공인했던 무속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여 근절에 나선 이들은, 바로 서구의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과학숭배에 흠뻑 젖은 개화기의 근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국가적 통제와 과학적 이해 그리고 일률적인 통합이 불가능한 조선의 다양한 무속은 없애야 할 미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나 개신(改新) 유교와 같은 이념적 배경을 가진 개화기 조선의 계몽주의자들은 무속을 조선 민족의 상징물로 볼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무속이나 점술을 조선인의 발목을 잡은 악습으로 지목했습니다(박은식, '구습개량론(舊習改良論)').

일제시대 일제 당국은 물론 우파적 민족주의자와 좌파 또한 각각 목적은 달랐지만 모두 '미신 타파'라는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일제 당국은, 종교 활동 규제를 통해 조선인의 일상을 보다 잘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길흉화복을 함부로 말하는 자를 처벌하겠다고 나섰습니다('경찰범 처벌 규칙', 1912년 3월).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재산을 탕진케 하는 미신을 타파함으로써 일상의 자본주의화를 지향했습니다.

그리고 좌파 지식인들은, 정신으로 만병을 치료하겠다는 목사들을 큰 무당이라고 부르며 조롱하기도 했습니다('경성의 미신굴(迷信窟)', '개벽'제48호, 1924년 6월). 근대 우월주의적 시각에서 무당이나 판수들을 쓸데없는 인간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에서는, 식민지 당국이나 민족 진영의 좌.우파가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30만명의 무속인과 역술인이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무속 의례 기능 보유자들이 인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무속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무속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오늘날의 모습은, 우리가 근대 미신 타파의 광기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진 설명 전문>
1904년 찍은 굿 장면으로, 맨 앞에 누워 있는 환자의 치유를 가족들이 뒤에 둘러선 채 기원하고 있다. 사진을 찍은 사람과 최초 출처는 알려지지 않앗는데 당시 생활상을 드러내는 주요 자료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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