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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걸리던 개표 1분 만에 끝 “한국 덕에 99.9% 투명한 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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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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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 국회의원 선거일인 지난 4일 수도 비슈케크의 1001번 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한국의 광학판독개표기(PCOS)에 투표용지를 넣고 있다. [김경희 기자]

4일 오후 8시(현지시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의 1001번 투표소. 국회의원 총선거가 마감된 직후 한국의 광학판독개표기(PCOS)를 통해 이곳의 개표 결과가 출력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수(手)개표로 최소 3일은 걸리는 작업이 1분 만에 끝났기 때문이다. PCOS는 투표용지를 일반 투표함에 넣어 하나하나 분류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유권자가 투표 후 광학판독기에 투표용지를 넣으면 거기에 묻은 잉크를 자동으로 인식하는 시스템이다. 이날 개표 결과는 즉시 인터넷을 통해 중앙선관위(CEC)로 전송됐다. 개표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정을 막고 개표 시간을 줄이기 위해 처음 도입된 한국 선거자동화 시스템의 진가가 발휘된 순간이었다.

키르기스스탄에 선거자동화시스템 지원

 같은 시각, CEC에서 각 투표소의 개표 결과가 전송되는 상황을 지켜보던 원준희 키르기스 선거지원단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 중앙선관위 소속인 원 단장은 “키르기스의 인터넷망이 한국보다 불안정하기 때문에 혹시 오류가 생기거나 해킹이 일어나진 않을까 걱정돼 전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두 시간 후 전국 2338개 투표소(해외 36곳 제외) 중 95%의 개표 결과가 집계됐다. 시민들도 CEC 홈페이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개표 결과를 지켜봤다. 현지 언론들은 후보 등록을 한 14개 정당 중 6개 정당이 국회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물론 120개의 의석이 어떻게 분포될 예정인지를 분석해 보도할 수 있었다. 5일 오전 11시, 투이구날리 압드라이모프 중앙선관위원장은 “이번 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시민 단체인 ‘타쟈샤일로(깨끗한 선거)’도 “한국의 투표제도를 도입해 99.9% 투명한 선거가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키르기스는 ‘가난보다 부정을 못 참는 나라’라고 불린다. 2005년 튤립 혁명과 2010년 반정부 시위를 통해 대리투표·개표조작 등 부정선거로 선출된 정권을 교체했다. 이번 선거 지원 프로젝트는 2013년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투명한 선거’는 온 국민의 염원이었다. 3세 딸과 함께 투표소를 찾은 마니라 블라디미로브나(35)는 “달라진 선거제도 덕분에 딸에게는 더 나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굴나르 주라바예바 중앙선관위 부위원장은 “예전에는 정당들이 각 지역 선관위원을 돈으로 매수해 선거 결과를 조작하는 일이 많았지만 이제 불가능해졌다”며 “대신 더욱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등 유권자들에게 한 표를 호소한다”고 했다.

선진적인 선거시스템은 선거문화도 바꿨다. 유권자들은 투표장에 적극적으로 나와 투표권을 행사했고 투표 당일은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이번이 생애 첫 투표였던 대학생 아자트 무라탈리예프(23)는 “새로운 선거시스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꼭 투표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비슈케크의 1123번 투표소에선 500번째 투표자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이벤트도 벌였다. 이 투표소 위원장인 보고슬라브스카 나제즈다(62)는 “20년 넘게 투표소 위원장을 해오고 있지만 이번처럼 즐거운 선거는 없었다”며 “예전보다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투표장에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인구 600만의 신생 민주주의 국가, 키르기스의 총선을 보기 위해 69개국 613명의 참관인이 몰린 점도 이색적이다. 총선 날이 생일이기도 했던 카자흐스탄 참관인, 디나라 아바코바(29)는 “생일 선물과도 같은 총선 결과인 것 같다”며 “카자흐스탄에도 한국의 선진 선거시스템이 도입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지만 모든 게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원 단장은 “우리나라에서도 쓰지 않는 기계를 어떻게 믿고 도입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땐 솔직히 말문이 막혔다”고 털어놨다. 실제 한국에서도 정치권의 불신으로 이 시스템이 선거에 투입되진 못하고 있다. 또 ‘무사안일하다’는 비판을 받는 현지 공무원들을 움직여 새로운 선거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었다. 선거 지원에 나선 한국 선관위가 유엔개발계획(UNDP)과 같은 국제기구도 해킹 가능성 등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외교부를 설득해 공적개발원조(ODA)를 따내야 했다. 결국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힘을 보태면서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선거자동화 시스템에 드는 비용 1200만 달러 중 KOICA가 600만 달러, 나머지는 키르기스 정부가 부담했다. 이동구 KOICA 아시아2부장은 “학교나 병원을 지어주는 것보다 선진적인 선거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게 키르기스의 발전에 더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며 “우즈베키스탄 등 주변국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한국의 ‘선거 ODA’가 붐을 일으키기 바란다”고 말했다. 중앙선관위와 KOICA는 케냐와 에콰도르의 2017년 대통령선거 지원도 추진 중이다.

비슈케크=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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