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추임새] 가수의 가벼움도 시대의 흐름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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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연예인들이 마구잡이로 고른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는지 겨루는 SBS-TV의 '도전 1000곡'은 가족들이 즐겨 보는 인기 프로다.

시청자들은 중견 가수가 신세대 노래를 애교있게 부르거나 신세대 가수가 옛날 노래를 척척 부를 땐 감탄하고, 자기가 아는 곡을 출연자가 잘 몰라 발을 동동 구르거나 엉뚱한 가사로 어물쩍 때우려다 떨려나는 모습을 보며 일요일 아침을 즐긴다.

그러나 가수 입장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보는 일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최근 '도전 1000곡'에 비친 풍경을 다룬 기사(본지 6월 13일자 S8면)가 나가자 본지 인터넷 사이트(www.joins.com)에 유명 가수 김모씨가 장문의 이견을 달아 눈길을 모았다.

"'도전 1000곡'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그는 "가수가 자기가 추구하는 장르와 전혀 상관없는 노래의 가사를 틀리지 않고 부르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물었다.

그는 "과연 미국 방송에서 에릭 클랩턴을 불러다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를, 이왕이면 춤도 비슷하게 추면서 부르라는 주문을 하겠느냐"면서 "화가들에게 '질 나쁜 도화지에 지금부터 피카소 그림을 똑같이 그려 보라'고 시킨다면 누가 선뜻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도 분석했다. 우리나라 가수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부족하고, 방송의 힘이 막강해 PD의 주문을 거절할 수 없거나, TV에 한번이라도 출연해 인지도를 높여보겠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씨의 글은 며칠 후 본인에 의해 삭제됐지만 여운을 남겼다.

이런 의견은 비단 김씨만의 생각은 아닌 듯 하다. 가수 신해철씨는 "'도전 1000곡'이라는 한 프로그램보다는 대부분의 오락 프로에서 가수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라"면서 "가수를 초라하게 만드는 방송 풍토가 된 데는 솔직히 가수들 책임도 크다"고 말했다.

가볍게 웃자고 만드는 오락 프로그램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일까. 글쎄다. 나름대로 어려운 과정을 거쳐 가수가 되어, 밤을 새우며 곡을 만들고 어렵사리 한 장 한 장 앨범을 발표해온 가수라면 자신들을 바라보는 마냥 가벼운 시선이 섭섭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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