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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미국 왕따 유학생… 지금 유엔이 주목한 구호단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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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는 한국인이야』 저자 신세용 국제아동돕기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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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옥스퍼드 출신 금융회사 CEO
돈이 행복 주진 않아 구호단체 세워

10세 홀로 일본여행, 13세 미국 유학
뭘 해도 존중해준 아버지 덕에 용기

1992년 미국 유학 중인 17세 소년 신세용의 당돌한 에세이 『나는 한국인이야』가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출판가에 돌풍을 일으켰다. 중학교 1학년 때 단신으로 미국 유학을 떠난 소년이 겪은 어려움과 극복 과정을 쓴 책이었다. 7년 후 소년은 영국 옥스퍼드대에 진학한 사연을 담아 『나는 한국인이야2』를 펴냈다. 그 신세용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올해 41세가 된 그는 국제아동돕기연합(UHIC) 이사장으로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세계 어린이를 돕고 있다.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레스토랑 ‘유익한 공간’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이 레스토랑의 수익금 전액은 세계 아동 후원금으로 쓰인다.

인종차별·폭력으로 고통스러웠던 유학

신씨는 어린 시절부터 궁금한 게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발전하나. 인간 진화의 원동력을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미국 유학 중인 두 살 위 형이 방학 때면 더 의젓해지고 어른스러워지는 모습을 보며 그 원동력이 미국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길로 가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몇 시간 만에 부모님께 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는 혼이 났지만 아버지는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꿈을 이루기 위해 대단한 결심을 했다며 그렇게 원하면 보내주겠다고 해서 유학을 가게 됐죠.” 그때가 88년 봉은중 1학년 13세 때였다.

유학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빨리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엄격하기로 유명한 버지니아주 서부의 한 사립학교에 그를 입학시켰다. 버지니아 서부는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그 학교는 미국 내에서도 부유한 집 문제아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마약에 손을 대는 아이, 총을 소지하고 다니는 아이 등 온갖 종류의 문제아들이 모여 있었다. 난생처음 동양인을 본 아이들은 그를 외계인 취급하며 이유 없이 때렸다. 어느 날은 잠을 자다가 야구방망이로 맞아 뼈가 14곳이나 부러지기도 했다.

그는 “2년간 그 학교에 다녔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악착같이 싸우고 매일 저녁 울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에겐 알리지 않았다. 간절히 원해서 온 유학이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싸움으로도 공부로도 지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매일 싸우고 맞고 우는 생활을 2년 가까이 하고 나니 그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럴 때면 담뱃불로 자신의 손을 스스로 지지곤 했다. 방학에 귀국한 아들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매일 계속되는 싸움과 스스로 만든 담뱃불 자국이 남긴 상처가 곪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제야 아들의 상황을 알게 됐다. 한국에 돌아오라고 했지만 소년은 ‘이대로 포기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유학을 고집했다. 아들의 의지를 꺾지 못한 부모는 미국 내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하지만 고교 입학 후부터는 갑자기 쓰러지는 증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쓰러졌는데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만 했다. 쓰러지고 나면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해 1년 안에 죽을 거로 생각했다”며 “언제 어디서 쓰러질지 모르니 친구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말했다. 2년간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공부를 멀리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이 1년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미국에 온 이유, 세상을 이끄는 원동력에 대한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해법만 얻으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옥스퍼드대에 재학 중이던 형이 삶에 대한 의문을 풀고 싶다면 정치경제철학과에 입학하라고 권유를 했어요.” 그때부터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하루 2시간만 자면서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를 했다. “인생이 1년 남았는데 8개월 안에 무조건 합격해야 했죠. 그 절박함이 합격으로 이어졌어요.”

옥스퍼드대에서의 공부는 지난 8개월의 공부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어려웠다. 하루 최소 10권의 책을 읽어야 했는데 철학 원서는 한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웠다. 그는 “철학 서적의 경우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며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내가 궁금해했던 삶의 원동력은 그간 내가 겪어온 삶, 즉 삶에 대한 추구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철학 공부에 빠져들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쓰러지던 죽음과도 같았던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자유와 선택, 책임 강조한 아버지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다시 미국에서 제 발로 서겠다는 아들을 지지한 것도 아버지였다. 신 이사장의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매일 5분씩 강의를 했다. 삶에 대한 철학적 질문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신 이사장은 “뭐든 선택할 수 있게 해주셨고 선택한 후에는 책임을 지도록 하셨다”며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팩스나 전화로 5분 강의를 했고 인간의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늘 대화했다”고 말했다. 그가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모든 선택은 너의 자유이나 책임 역시 네 것’이라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10세 때 그는 혼자서 일본 여행을 했다. 그걸 허락해준 아버지께 아직도 감사한 마음이다. 아버지에게 일본에만 파는 장난감이 있는데 그걸 꼭 사야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그 장난감을 스스로 사오라고 했다. "그때부터 안마도 해드리고 구두도 닦으며 아버지께 용돈을 벌었어요. 아버지는 비행기 값을 대주셨고 호텔비와 체제 비용, 장난감 구입 비용은 제가 모았어요. 어머니께는 학교 캠프에 간다고 하고 3박 4일간 혼자 일본에 다녀왔어요. 물론, 장난감도 사왔죠. 어머니는 지금도 모르세요.”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줬다. 앞면에는 주소와 이름, 전화번호가 적혀있었고 뒷면은 썼다 지울 수 있도록 만들어 지도를 그리게 했다. 호텔에서 출발하는 길을 그려 돌아올 때는 그 지도를 보고 돌아왔다. 무사히 10세 아들은 일본행을 마쳤다. “아버지는 한 인간의 마음 깊이서 우러나오는 열망을 꺾는 일은 그 사람의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어떤 일이건 포기하지 않는 힘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단순 기부 넘어 아프리카 질병 예방

옥스퍼드대를 졸업하면서 그는 또 다른 의문을 갖게 됐다. ‘왜 세상은 발전했는데 기아와 전쟁은 계속될까’였다. 모두가 행복하고 따뜻할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던 그는 국제구호단체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우선은 사업해서 어느 정도 자본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난 50~60대에 구호단체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 KAIST 금융공학 MBA를 마친 후 금융회사를 설립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돈을 많이 벌어도 행복하지가 않았다. “돈을 모아서 구호단체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돈으로 바뀌는 걸 느꼈어요.”

서른 살이 되던 2003년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국제아동돕기연합(UHIC)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다른 NGO들처럼 1대1 결연이나 자원봉사단 파견, 의료 치료 등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지금은 질병 예방에 집중하고 있다. ‘2012 유엔이 주목하는 민간단체’에도 뽑혔다. 유엔이 주목한 프로그램은 탄자니아 ‘키퍼(Keeper·지킴이) 프로그램’이었다. 탄자니아 오지 마을의 청년 한 명을 선정해 1년간 UHIC 프로그램 교육을 시키고 다시 마을로 돌려보내 마을을 지키는 키퍼로 일하게 하는 사업이다. UHIC가 이들에게 월급을 준다. 지금까지 30개 오지 마을에서 30명의 키퍼를 교육했다. 이들은 1인당 400~500명의 5세 미만 유아를 관리하며 질병을 예방하고 있다. 계절별로 유아가 잘 걸리는 질병은 무엇인지, 마을의 위생 상태는 어떤지를 스마트 패드에 매일 저장하고 매달 서울 본부로 데이터를 보낸다. 데이터를 보면 마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질병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다.

“단순 기부는 당장 눈앞의 질병이나 가난은 피하게 할 수 있지만 근본적 대책은 되지 않아요. 치료는 결과가 눈에 보이지만 예방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리가 100명의 질병을 막았다고 해도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생기지 않게 미리 예방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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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실천 레스토랑 ‘유익한 공간’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유익한 공간’은 가구 기업 ‘카레클린트’에서 가구를, 커피전문점 ‘커핀그루나루’에서 커피를 후원받는다. 식재료는 ‘삼성웰스토리’가 지원한다. 유익한 공간은 분위기도 맛도 일반 레스토랑과 별반 다르지 않다. 분위기나 맛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한 번 이상 찾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레스토랑 안에는 아이들을 후원해 달라는 포스터나 문구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테이블 종이 매트에 작은 글씨로 ‘유익한 공간에서 한 끼의 식사를 하시면 아프리카 불우아동에게 한 끼의 식사가 보내집니다’라고 쓰인 게 전부다.

“나눔은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문화로 형성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맛있어서 찾은 레스토랑인데 분위기도 좋고 그래서 단골이 됐는데 알고 보니 수익금 전체가 기부되는 곳이었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거죠. 그런 작은 따스함이 실천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글=김소엽 기자 soyub.kim@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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