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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 황당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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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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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콘텐트를 보고 사진도 공유할 수 있는 모바일용 웹사이트와 앱을 만드느라 지난 3개월 동안 옛 자료들을 뒤적이면서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늘 이랬다고 착각하며 살아왔는데,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가 지금과는 너무나 확연하게 달랐다는 걸 깨닫게 돼서다. 고층 빌딩이 경쟁적으로 올라가는 등 경제 발전의 속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공유하는 인식 수준은 물질적 격차를 훌쩍 뛰어넘어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를 겪어 왔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그걸 잘 드러내는 게 교과서다.

 지금은 사석에서조차 함부로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이 내가 학교를 다니던 70~80년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다니,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1977년 체육 교과서에는 ‘나쁜 유전적 소질은 반드시 자손에게 나타나므로 결혼할 때 우생 보호 상담 등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우생 상담이라는 표현만으로도 꺼림칙한데 좀 더 읽어보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자녀의 한평생은 부모의 재능과 인격, 건강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된다’며 ‘특히 남자는 여자(배우자)의 선택에 신중을 기하라’고 권한다. 어떤 부모를 두느냐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행불행이 결정된다는 사고방식이나, 아내를 자식 농사 수단으로만 여기는 남녀차별적 인식을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에게 주입했다니 놀랍다. 이런 내용이 과목별로 적지 않았다.

 한편으론 황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녀의 사회적 지위나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지금과는 많이 다른 70~80년대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요즘 교과서는 인권이나 남녀 문제는 훨씬 조심스럽게 다룬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지금의 교과서 역시 그 시절 교과서만큼 황당하다. 시대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는커녕 현실과 동떨어진 수십 년 전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게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중학교 기술·가정 교과서에는 깍두기에 쓰는 무는 2㎝, 감자 볶음용 감자는 0.5㎝ 두께로 썰어야 한다고 정해 놓았다. 교과서에 이런 온갖 숫자를 나열하고 교사는 이걸 토대로 시험문제를 내니 아이들은 현실에 맞든 안 맞든 이 쓸모없는 지식을 달달 외울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더 많이 시킬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쓸데없는 교과서를 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 건 그 누구도 동의하기 어렵지 않을까.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