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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있기에 천국이 소중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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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호 14면

로댕의 ‘지옥의 문’(1917), The Kunsthaus Zurich, 사진 위키피디아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1265~1321)가 바라본 지옥의 문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그것은 겁주는 말이 아니라, 지옥이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이었다. 헛된 희망은 더 큰 상처가 될 뿐인 곳이 지옥이다. 1300년 성금요일에 숲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단테가 이른 곳은 지옥의 문 앞이었다. 그가 어쩌다 길을 잃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그렇게 던져졌고, 스스로 길을 찾아나가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던져져 스스로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단테와 현대인들은 처지가 비슷하다.


단테에게는 그래도 구원의 여신 베아트리체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이 있어 지옥, 연옥을 거쳐 구원의 천국에 이를 수 있었다. 해서 단테의 여행은 긍정적 엔딩을 암시하는 ‘신의 희극(divine comedy)’이라는 제목이 붙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내자도 구원의 가능성도 희박한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결국 인간 비극(human tragedy) 밖에 없는 것일까.


지옥,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욕망만 들끓는 곳천국에 가기 위해 단테는 반드시 지옥을 거쳐야 했다. 없어야 소중한 줄 알고, 당해봐야 고마운 줄 아는 법. 지옥을 모르고서는 천국의 기쁨을 진정 알 수가 없다. 악마는 은폐하고 천사는 드러낸다. 지옥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은 천사들이다. 지옥을 알아야 지옥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들은 단테가 지옥의 실상을 보는 것을 방해한다. 원인과 결과도 모른 채, 악행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설명하는 입장에서도 천국보다 지옥이 설명하기 더 쉽다. ‘천국(Paradiso)’은 ‘지옥(Dis)에 대항하는(Para)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지옥이 아닌 곳이 곧 천국이란 말이다. 살면서 천국 같은 체험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지옥 같은 일을 당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니, 지옥에 대한 설명이 더 쉬울 터다.


지옥의 생생함은 근본적일 수밖에 없다. 단테가 지옥에서 만난 자들의 상태는 “살았을 때와 같이 죽어서도 이렇다(14:51).” 그들이 받는 벌은 살면서 지은 죄와 직접적인 대응관계가 있으니, 지옥은 불가피한 삶의 연장이 될 수밖에 없다. 단테가 만난 지옥에 빠진 자들은 살아서 그랬던 것처럼 죽어서도 욕망을 멈출 줄 몰랐다. 영원히 살 것처럼 돈을 그러모으고, 권력을 탐했다. 그러나 몸이 죽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욕망만 여전히 살아 들끓으니, 그곳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열지옥이 되고 있었다.


사후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그 행복, 그 기쁨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옥이 지옥인 이유는 그 고통, 그 괴로움을 영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힘들더라도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면서 우리는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만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반대로 희망이 없는 곳에서는 현실도 지옥이 되고 만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지옥은 지옥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죽을 희망조차 없는 곳이다.


단테의 지옥이 현실보다 나은 점도 있다. 그곳에서는 권력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정당하게 벌을 받는다. 단테는 자신의 동시대인들 여러 명을 지옥에서 만나는 것으로 설정해 그들을 엄정하게 단죄했다. 지옥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던 정의가 실현되는 공간이기도 하며,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성찰은 좋은 일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겸손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때로는 삶을 견디게 해준다. 이런 강력한 삶에 대한 환기력 덕분에 전체 『신곡』중에서 지옥편은 가장 생생하고, 후대의 예술가들 역시 가장 많이 참조하는 파트가 되었다


우리가 저지를 지도 모를 죄를 보다문학 작품이었던 단테의 『신곡』이 로댕(1840~1917)의 ‘지옥의 문’이라는 조각 작품이 됨으로써, 지옥은 만져질 것 같은 생생한 현실이 됐다. 단테의 언어가 로댕의 신체조각이 되면서 열망들은 더욱 극단적인 것으로 고조된다. 단테가 묘사하는 지옥의 모든 인간들이 서로 얽혀있고 붙어있듯, 로댕의 ‘지옥의 문’에는 200여 개의 형상이 서로 얽혀 있다. 엇나간 사랑을 하고, 증오하고, 배반하고, 기만하며 죄를 지은 인간들은 지옥에서도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 죄의 근원은 소멸되지 않고 잘못이 부단히 반복되는 곳,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증오와 분노 속에 여전히 휩싸여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에 ‘지옥의 문’ 위의 모든 형상은 팔을 치켜 올리고, 매달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형상들은 모두 별개의 제목을 가진 별개의 작품으로 따로 제작되기도 했다. 여러 형상이 혼돈스럽게 배열되어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천국의 언어는 질서와 명징함이고, 무질서와 혼란은 지옥의 언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문 상층부에는 발 아래 펼쳐지는 광경을 내려다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후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독립된 조각으로 발전한다. 원래 ‘시인 단테’로 기획된 이 사내는 전사처럼 대단한 근육질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그의 거친 근육은 인간을 단죄하고 벌을 주는데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울퉁불퉁 깊어지는 사유의 근육이다. 그는 인간에 대해, 즉 인간의 죄와 사랑과 생로병사의 필연성에 대해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지옥을 여행하는 중간중간 단테는 종교적 엄격성과 인간적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옥에 빠진 자들의 이야기가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였다면, 단테에게는 지옥이 두렵지도, 흥미롭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단테가 지옥에서 본 것은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저지른 많은 죄들, 살면서 우리가 저지를 지도 모르는 죄들에 관한 것이었다.


로댕이 ‘지옥의 문’을 처음 의뢰받은 것은 1880년. 37년이 지났지만 그는 끝내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사후 21년만인 1938년에 첫 번째 에디션이 주조되면서 작품은 세상에 공개됐다. 로댕이 더 살았다 해도 작품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옥의 문에 담아야 할 내용들이 점점 늘어나기만 했기 때문이다.


단테에게는 지옥 위의 연옥과 천국이 있지만, 로댕에게는 오로지 지옥만 있다. 천국이 없는 지옥은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진 하나의 주어진 현실이 됐고 그 지옥에서 살아내기가 우리의 삶이 됐다. 그래서 오랫동안 로댕의 예술에 대해서 끊임없이 찬사를 보냈던 릴케가 로댕의 작품에서 읽어낸 것은 오직 하나, “삶, 이 놀라움” 그 자체였다. ●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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