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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접촉한 탕샤오이에게 ‘도끼 자객’ 보낸 장제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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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호 29면

1924년 크리스마스, 상하이의 기업인들이 마련한 자리에 참석한 탕샤오이(앞줄 오른쪽 일곱번째)와 부인 우유차오(吳有?, 오른쪽 아홉 번째). 우유차오 바로 왼쪽에 손을 깍지끼고 앉은 남자가 국제사회에서 ‘웰링턴 쿠’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위 구웨이쥔(顧維鈞). [사진 김명호]

1937년 12월 중순 일본군이 국민정부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1개월 후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가 첫번째 대 중국 성명을 발표했다. “금후 제국정부는 국민정부를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제국과 합작이 가능한 정권의 건립을 희망한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신중국의 건설과 부흥에 협조하겠다.” 한 마디로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겠다는 의미였다.


국민정부 재정부 상하이특파원이 일본의 구상을 탐지했다. 중요 내용을 상부에 보고했다. “갑(甲), 국민당 우파의 영수와 항일 영수를 갈라 놓는다. 전자를 끌어들여 전국적 성격의 정부를 난징에 수립한다. 을(乙), 국민당 우파를 통해 군벌과 그 군대를 회유해 항일 의지를 느슨하게 한다. 필요 시에는 와해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병(丙),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자본가들과 연계해 중국에 대한 차관과 무기 제공을 방해한다.”


일본의 구체적인 방안도 빠뜨리지 않았다. “신정권의 수반은 탕샤오이(唐紹儀·당소의)가 가장 적합하다. 국민당 내 각 계파 영수들 사이에 신망이 두텁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다. 중화민국 초대 내각총리 탕샤오이가 정부를 조직하면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정부에 손색이 없다. 탕샤오이가 거절할 가능성이 크다. 난징으로 납치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탕샤오이의 반응은 4개월이 지나서야 나왔다. 5월 20일 오후, 일본측과 접촉이 많은 옛 비서를 불렀다. “일본인들에게 내 뜻을 전해라. 양국이 화의를 하려면 요구하는 쪽이 먼저 전쟁을 그쳐야 한다. 그칠 생각이 없으면서 화의를 원하는 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행위다. 정전 후 담판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간 양측이 체결한 모든 협정부터 취소해야 한다.” 탕샤오이는 신임 일본대사의 면담 요청도 거절했다.


장제스도 전쟁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내심으론 일본과의 화의를 갈망했다. 일본이 국민정부와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탕샤오이가 떠올랐다. 외교의 능수 탕샤오이가 개인 자격으로 일본과 접촉하기를 희망했다. 동시에 탕샤오이의 심리적 동요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일본 특무기관 책임자와 밀담을 나눴다는 보고를 접하자 붓을 들었다. 탕샤오이의 이름 석자를 지워버렸다.


탕샤오이는 셰즈판(謝志磐·사지반)이라는 청년을 좋아했다.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한 준재였다. 탕샤오이의 집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경호원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몸수색도 당하지 않았다. 탕샤오이의 친구 중에 셰즈판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 “형제 중에 국민당 특무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며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탕샤오이는 한 귀로 흘렸다.


하루는 셰즈판이 골동품 상인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경호원들은 집주인이 골동품 애호가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셰즈판과 안부를 주고 받으며 상인의 몸을 수색했다. 도자기 등 골동품도 이상이 없었다. 평소처럼 거실로 안내했다.


탕샤오이가 나타나자 셰즈판은 함박 웃음을 지었다. “프랑스 조계에 피난민들이 넘칩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명품들을 시장에 내놨습니다. 헐값에 구입하실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어서 일행을 손으로 가리켰다. “총리를 존경하는 골동상인들입니다. 몇 점 골라 왔으니 감상을 청합니다.” 도자기를 살피던 탕샤오이는 탄성을 질렀다. “천하의 진품들이다.” 가격도 저렴했다.


일차 연습을 마친 군통(軍統)의 암살 전문가들은 신중했다. 여러 차례 탕샤오이의 거처를 왕래하며 습관을 파악했다. 훗날 암살에 참여했던 군통 요원이 임종 직전 구술을 남겼다. “아주 귀한 물건을 볼 때는 경호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국장 지시대로 도끼를 사용하기로 했다.”

낙향 시절, 컬럼비아대학 동창인 철도국장 중쯔위안(種紫垣)의 방문을 받은 탕샤오위(왼쪽 세 번째)부부와 자녀들. 1922년 봄. 궁러위안(共樂園). [사진 김명호]

9월 30일 오전 9시, 남색 승용차가 탕샤오이의 저택 앞에 멈췄다. 보슬비에 가을 바람이 더한 음산한 날씨였다. 익숙한 얼굴들을 본 경비원은 군말 없이 철문을 열었다.


송(宋)대 황제의 친필이 새겨진 대형 화병을 본 탕샤오이는 입이 벌어졌다. 흥분을 달래기 위해 담뱃불을 붙이는 순간 골동상인이 화병 속에서 손도끼를 꺼냈다. 한 방에 머리 정면을 맞은 탕샤오이는 헉 소리도 못 내고 쓰러졌다.


밖으로 나온 셰즈판 일행은 문을 반쯤 닫은 채 안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바람이 찹니다. 나오지 마십시오”를 연발해 경호원들을 안심시켰다. 탕샤오이는 머리에 도끼가 박힌 채 병원에 이송됐다. 오후 4시에 숨을 거뒀다.


신문마다 일본의 소행임을 암시했지만, 국민당 특무를 의심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정부가 직접 수습에 나섰다. 10월 5일, 정부주석과 행정원장 명의로 조문을 발표했다. “탕샤오이의 평생 사적을 국사관(國史館)에 보존하고, 장례비 5000원을 정부가 부담한다.”


인간 세상은 파고들어 갈수록 모를 것 투성이다. 항일전쟁 초기 탕샤오이는 잠시 동요했다. 측근들 거의가 일본의 앞잡이로 전락했지만, 정작 본인은 일본의 요청을 끝까지 수락하지 않았다. 군통도 탕샤오이가 반역자라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암살을 당했기 때문에 만절(晩節)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이 그럴듯하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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