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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라드의 시대공감] 멀어져가는 8·25 합의의 기억

중앙일보

입력

지난 8월 25일 남북한은 큰 폭의 긴장완화를 의미하는 듯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한 달도 안돼 북한은 영변 핵시설이 정상 가동되고 있으며 미국의 ‘비열한 책동’에 핵무기로 대항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또 “선군 조선의 위성들이 우리 당중앙이 결심한 시간과 장소에서 창공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똑똑히 보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미사일 실험을 하겠다는 뜻이다. 뭐가 잘못된 걸까. 8ㆍ25 합의 이후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상황 변화가 있었던 걸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먼저 핵시설 가동과 미사일 실험에는 몇 달이 걸린다. 8ㆍ25합의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재가동 및 발사 결정을 이미 했다는 얘기다. 이 결정이 합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그걸 발표한 시기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물론 합의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사건들만 북한의 엄포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더 있다. 첫째는 오는 25일로 예정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의 정상회담이다. 둘째는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일이다. 셋째는 미사일 실험을 해야 하는 기술적인 필요성이다. 북한 기술자들은 장기간 미사일 실험 없이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진척시킬 수 없다.

그럼에도 핵 재가동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북한 당국의 발표 시점이 8ㆍ25합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모든 게 한국군 장병들을 다치게 한 지뢰 매설에서 시작했다. 북한이 뭘 의도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박근혜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북 확성기를 켜게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뢰를 매설한 주체는 체면을 구기게 됐다.

북한은 겨우 확성기를 끄게 하는 대가로 그동안 거부해 왔던 고위급 접촉과 이산가족 상봉, 민간 교류까지 현실화한 데 이어 지뢰매설에 대한 유감까지 표명해야 했다. 그러곤 대남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시각차까지 드러냈다. 북한군 총정치국장인 황병서는 “남조선 당국은 근거없는 사건을 만들어 일방적인 행동으로 상대 측을 자극하면 군사적 충돌을 불러올 수 밖에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찾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우리는 합의정신에 기초해 온 겨레의 지향과 염원에 맞게 북남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주영 북한대사관 등 북한의 대외기구들은 김양건의 발언은 홍보했지만 황병서의 것은 알리지 않았다.

강경파에게 8ㆍ25 합의는 정치적 패배이자 굴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빠르게 회복했다. 불과 사흘 후 김정은은 합의가 “파국에 처한 북남관계를 화해와 신뢰의 길로 돌려세운 중대한 전환적 계기”라면서도 “평온은 회담탁우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자위적 핵 억제력을 중추로 하는 무진막강한 군력이 있기에 이룩될 수 있었다”고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나아가 ‘유감’은 잘못을 인정한 게 아니라고 강조한 데 이어, 남북은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문에 명시된대로 추석이 아니라 10월 20~26일에 하기로 했다. 8ㆍ25합의가 크게 후퇴한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실험 위협은 강경파가 최종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일을 되새겨보면 북한 고위층엔 아주 근본적으로 남한과 화해하는 것을 반대하는 무리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긴장완화는 통일로 이어지고 자신들은 권력과 특혜를 잃는다고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관련 발표를 한 것은 남북 긴장완화 가능성을 아예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한다면 한국은 뭔가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도 악영향을 받을 것이다. 강경파가 원하는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 회담이 이어지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몇 주 후 장거리 미사일을 포함한 공격적인 미사일 실험을 보게 될 것이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격론이 벌어질 것이다. 보통 안보리에서 중국은 북한 편을 들어주지만 이번 논의는 시진핑의 방미 이후 미ㆍ중 관계가 좋은 상태에서 이뤄지게 된다. 게다가 지난 3일 천안문 광장 열병식은 중국이 북한보다 한국을 얼마나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드러냈다. 따라서 중국이 북한을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지 의문이다. 상식적으론 말이 안되지만 북한은 이럴 때 타개책을 찾기보다 고립을 스스로 심화시켜 왔다.

자꾸 이런 일이 이어지면 박 대통령은 어느 시점에선 휴전선 확성기를 다시 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참 궁금하다. 8ㆍ25합의 같은 일이 재연될까. 아니면 북한이 포탄으로 확성기를 때려부술까. 애석하게도 8ㆍ25의 낙관적 분위기는 곧 먼 기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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