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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의 완성, 앞으로 15년은 더 걸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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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지혜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문규 기자 중앙일보 기자
독일 통일 뒤 주정부 차원에서 실질적 통합 업무를 담당했던 알빈 네스 전 작센주 복지가족부 차관(왼쪽)과 토마스 쿤츠 전 튀링겐주 법무부 차관보가 16일 김영희 대기자에게 통합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조문규 기자]

겉보기에 독일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왔다. 그러나 그 통일은 1949년에서 89년까지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의 통일외교의 긴 여정 끝에 온 것이다. 89년 베를린장벽 붕괴로 온 통일은 물리적·법적 통일이었다. 그러나 동·서독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통일은 화학적·정서적 통합(Integration)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주(Land) 정부 차원에서 통일 후의 통합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직접 수행한 토마스 쿤츠 전 튀링겐주 법무부 차관보와 알빈 네스 전 작센주 복지보건청소년가족부 차관이 고려대법학전문대학원이 주최한 심포지엄에 참석하러 한국에 왔다. 언젠가는 한국이 직면할 문제를 그들은 어떻게 해결했는가를 김영희 대기자가 3자정담으로 물었다.

김영희 묻고 두 독일 전문가 답하다
고려대 초청으로 한국 방문

김영희=법적·물리적 통일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회통합이 따릅니다. 통일된 독일의 내적 통합(Inne Einheit)을 위해 먼저 한 일은 동·서독의 생활 수준을 균등하게 하는 것인데 이걸 위해 네스 차관께서는 사회복지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수행하셨습니다. 이젠 내적통일, 사회통합은 완성된 겁니까.

 네스=독일은 내적 통합은 95% 정도는 이룬 것 같습니다. 높은 비율이죠. 95% 중에서 70%는 비교적 빠르게 이뤄냈고 나머지 80%까지도 비교적 빨리 이뤄졌는데. 90%, 95%까지는 더디게 진행됐어요. 나머지 5%는 앞으로 15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그 남은 5%는 어떤 분야입니까.

 네스=사람들의 정서에 관한 부분입니다. 옛 동독 사람에게 주체적인 주권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게 중요해요. 90년 독일 통일로 동독지역은 모든 것이 몰락한 결과 대부분의 사람이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체념하는 정체성 상실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체성을 갖게 하고, 정서적으로 한민족이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게 나머지 5%의 작업일 것입니다.

 김=네스 차관은 고려대 강연에서 삶의 현실의 통합은 한 세대에는 극복할 수 없는 길고도 힘든 과정이라고 하셨는데 이런 걸 다 포함해 지금까지 95%를 달성했다는 겁니까.

 네스=그건 어느 분야를 보느냐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을 것 같네요. 독일 기본법(헌법)에는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습니다. 독일은 연방국가라 주마다 정책이 다르고 나름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마다 경제적 수준의 차이도 많아요. 각 주는 그들만의 정체성이라는 게 있어요. 그래서 생각도 달라요. 경제통합이 아직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어요. 임금 수준을 보면 동독 출신들의 임금이 아직은 서독 사람의 90~95%입니다. 독일 정부는 2020년까지는 경제적인, 특히 노동 임금을 100% 균등화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김=통일하면서 동·서독의 연금 수령액을 1대 1 비율로 해 동독의 연금 생활자들이 큰 이득을 봤습니다. 그 부담을 안은 서독인들이 불평하지 않았습니까.

 네스=당연히 반발이 많았지요. 그건 단지 연금뿐 아니라 전체적인 통일과 관련된 경제 부분에 걸친 불평이었어요. 89년에서 90년 공식 통일까지는 통일에 대한 희열(Euphorie)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희의 분위기는 금방 식었어요. 89년 말에만 헝가리와 체코를 통해 서독으로 30만여 명이나 넘어왔습니다. 89년 말부터 90년 10월 3일 공식 통일까지 또다시 25만여 명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왔습니다. 그건 서독에 큰 경제적 부담이었어요. 동·서독은 화폐를 통합하면서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 차이가 1대 5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1대 1로 교환해 주고, 3000마르크 이상일 경우에는 1대 2의 교환비율을 적용했습니다. 생산성의 현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임금도 1대 1을 적용했습니다. 서독 사람들은 당연히 똑같은 임금을 받는 동독 사람들의 낮은 생산성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91년 초까지만 해도 생산량에서 옛 동독은 서독의 54% 수준이었어요. 지금은 80% 정도 됩니다. 그런데도 1대 1로 교환해주다 보니 부담이 컸고, 그런 큰 부담의 일부는 사회보험·사회보장에서 많이 떠안아야 했습니다. 옛 서독 연방 주들의 막대한 지원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김=네스 차관이 만든 대표적인 사회정책 분야의 법은 어떤 것이었나요.

 네스=독일엔 크게 네 가지 건강·연금·질병·상해보험이 있습니다. 94년엔 요양보험이 추가됐어요. 사회보장 말고도 중요하게 생각된 것 중 하나가 사회적 배상이었습니다. 히틀러 시대에 나치에 동조하지 않았거나, 분단 후 사회주의통일당(SED)에 협조하지 않은 ‘체제 이방인’들에 대한 보상 말입니다. 많은 고통을 받은 그들은 이제 고령이 되었는데 어떤 식으로든 배상을 해주는 게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그것 말고도 최저 생계에 미달하는 사람의 수가 10만 명당 5000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에 대한 보상은 옛 서독 정부가 60%를 지원했습니다. 

 김=동독 출신들이 옛 동독에 향수를 느끼는 오스탈기(Ostalgie) 현상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네스=그렇습니다. 그러나 오스탈기는 어린 시절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지 옛 체제에 대한 그리움은 아닙니다.  

 김=쿤츠 차관보의 말대로 옛 동독체제에서는 사법권이 독립되지 않아 법이 정치의 시녀 노릇을 했는데 통일 후 동독의 법을 어떻게 정비했습니까.

 쿤츠=법제 자체는 일단 서독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국가(Sozialestaat)보다는 법치국가(Rechtsstaat)의 원칙입니다. 주 정부 차원에서 판검사를 임용할 때 동독 출신을 그대로 임용해도 좋을 것인지에 관한 판검사선발법이란 걸 만들었습니다.  

 네스=옛 동독 법관들은 법학을 전공하려면 정부가 제시한 요건을 충족해야 했는데 그 전제조건이 사회주의 체제를 맹신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했습니다. 포츠담에서는 체제 신봉자가 아니면 법률을 전공하지 못하게 했어요.  

 김=쿤츠 차관보는 튀링겐주의 경우 동독 출신 법관 194명 중 101명이 재임용되고, 검사는 141명 중에 61명이 재임용됐다고 하셨는데 상당히 많은 숫자 같습니다.

 쿤츠=그들은 바로 업무에 투입하지 않고 추가적으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튀링겐주의 경우 일정한 기준에 따라 선발하기 전에 가우크(Gauck , 동독 국가안보부 슈타지의 기록을 보관하는 곳) 자료를 통해 옛 동독 시절에 했었던 모든 업무와 관련된 서류를 다 검토하고 시민 의견까지 듣고 나서, 서독 출신 사법부 사람들과 의회에서 그들의 과거 행적을 공개하고 찬반투표로 임용 여부를 결정했습니다. 그런 뒤에도 멘토링 프로그램, 정신교육을 실시해 새로운 법치국가에 맞는 법관으로 만들었습니다.  

 김=쿤츠 차관보께서는 동독 출신들이 서독 법의 비대화(Hypertrophie)에 고통받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쿤츠=법이 점점 세분화되고 범위가 확대되어 너무 복잡해 투명성을 잃어가는 현상을 말합니다. 모든 법규정이 100% 정당할 순 없는데 정당성 확보를 위해 법치주의 이념을 강조하다 보니 법이 복잡해집니다. 훌륭한 법은 건강한 인간의 오성(이해력)에 부합하는 것이면 적절합니다. 공산주의 통치를 받은 사람들에겐 통일 독일의 법이 어렵게 여겨질 것입니다. 동독 사람들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 방향성이 뚜렷하고 투명했는데 통일이 되고 보니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모든 절차를 거쳐야 해 힘이 드는 겁니다.

 김=네스 차관께서는 “통일이 되면 정의를 얻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얻은 것은 법치주의뿐”이라는 어느 동독 반체제운동가의 말을 인용하셨는데 정의도 법치 안에서 실현되는 것 아닌가요.

 네스=법치주의란 건 정당성을 전제하지만 법치주의가 너무 형식적으로 흘러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게 문제죠. 성경의 십계명은 153개 단어인데 독일 사회보장지출법 제19조 F항은 1367단어나 돼요. 복잡합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올해 80만 명의 난민을 수용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난민 수용에 관한 법의 유연성을 강조했습니다. 

 김=에리히 호네커(71~89년 집권) 전 동독 SED 서기장은 재판에서 어떤 판결을 받았나요.

 쿤츠=건강상 이유로 기소중지되어 결국 어떤 판결도 받지 않았습니다.

 김=슈타지 장관 밀케도 슈타지 활동과 상관없는 혐의로 가벼운 처벌을 받고 끝났는데요.

 쿤츠=사법부 독립 측면에서 말하자면, 밀케에 대한 판결은 사회적 민주적 결정 과정에 따라 사법부의 독립이 반영된 결정입니다. 슈타지 피해자들에게는 그게 혁명적인 판결일 수도 있지만 사법권 독립 차원에서는 공정한 판결이었어요. 

 김=독일의 통일 경험에 비춰 한국은 언젠가 올 통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쿤츠=통일이 생각보다 더 빨리 올 수 있다는 걸 각오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통일은 그 자체에 역동성이 있어 미리 계획을 짜놓는 건 무의미합니다. 통일은 자체의 역동성으로 찾아올 거란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엔 통일 이후 민주적 사회복지적 국가가 가진 잠재성과 기회를 많이 봤습니다. 한국도 통일에 따르는 걱정보단 기회와 가능성을 더 많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김=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토마스 쿤츠는 …
마인츠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 출신이다. 통일 전에는 헤센주에서 고문변호사 등으로 일했고(87~90년), 통일 이후엔 튀링겐주 법무부에서 일하며 사법 쇄신 업무 등을 담당했다(91~94년, 98~2000년).

알빈 네스는 …
뷔르츠부르크대·본대에서 철학과 신학·법학을 전공했다. 뮌헨 복지행정법원 판사로 일한 바 있으며(73~78년), 통일 뒤 작센주에서 복지보건청소년가족부 차관으로 일했다(90~2001년). 지난해부터는 독일가족연맹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