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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직격 인터뷰

국가개혁 전략가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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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상선
김상선 기자 중앙일보 부장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은 이명박 정부의 전략가였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내면서 ‘친서민 중도실용’ 정책을 입안해 곤두박질치던 정권의 지지율을 반전시켰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 홍보기획관, 정무수석, 사회특별보좌관을 잇따라 맡으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에 탈락해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지만 낙선했다. 사회학자 출신으로 온건·합리적 성향인 박 총장은 총장 업무와 함께 정치개혁 구상을 설파하는 데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공진(共進)국가’ 모델을 제시한다. 승자 독식의 양당 구도와 5년 단임 대통령제 대신 여야 합의와 연대에 기초한 연합정치와 포용 경제만이 변화된 대한민국을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제3의 길’을 찾는 움직임이 커지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다.

10일 여의도 국회 사무총장실에서 박형준 총장이 정치개혁 방안을 말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올해로 국회가 광화문에서 여의도로 이전한 지 꼭 40주년이 됐다. 하지만 ‘여의도’ 하면 정쟁과 밥그릇 싸움, 생산성 제로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의 대명사가 됐다.

 “왜 국회가 정쟁에만 몰두하게 됐는지 그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1987년 민주화 이후 급속히 다원화되면서 다양한 집단과 계층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국회와 정부는 지역주의 양당제와 대통령 5년 단임제가 근 30년째 이어지면서 여당은 승자 독식, 야당은 무한투쟁이란 틀에 갇혀버렸다. 선거도 너무 잦아 표의 논리가 정책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다. 국회가 마비되고 생산성을 낮추는 이런 구조부터 바꾸지 않으면 절대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 국회 바깥에서도 정치권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압력을 넣고 공론화해야 한다.”

 -결국 개헌으로 정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인 것 같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은 블랙홀’이라고 선언했지 않나.

 “그렇더라도 개혁을 포기할 수는 없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미래에 대한 비전과 용기를 가진 정치인을 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공감한다. 요즘 의원들은 공천과 당선에 관심을 집중하니 정치가 너무 왜소해진다. 총선에 공천, 당선이 되지 못해도 정치 지형을 개혁하는 데서 의미를 찾겠다는 의원들이 여야에서 나와야 하는데 답답하다.”

 -새누리당 현역 의원 2명(이한구·김태호)이 불출마를 선언했지 않나.

 “불출마 선언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해 불출마하느냐는 확신을 보여줘야 한다. 선거는 나라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인데 지사적인 면모를 갖춘 정치인들이 안 보인다는 게 문제다.”

 -왜 의원들이 공천과 당선에만 목을 매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보나.

 “여러 원인이 있지만 우리 정당이 국고보조금에 의존하는 기생적 정당이 된 탓이 크다. 그러다 보니 의원들도 당선 뒤 주어지는 혜택에 안주하고 다음 선거에서 재선될 생각만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국고보조금을 없애거나 정당들이 ‘국고보조금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본다. 국고보조금은 정책정당을 육성한다는 취지에서 나왔다. 그래서 30%는 정책개발비에 써야 하는데 그렇게 쓰는 정당이 어디 있나. 국고보조금을 정부가 정당에 준 지 수십 년이 됐다. 그동안 우리 정당들이 제대로 된 정책정당으로 변화했나. 국가가 이렇게 해마다 정당에 엄청난 돈을 주는 나라는 선진국 중에 없다.”

 -과감한 제안이다. 그러나 국고보조금을 없앤다면 여야가 가만있을까.

 “국고보조금의 대부분이 중앙당으로 흘러들어간다.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는 중앙당 기구가 당의 권력을 틀어쥐고 국가가 여기에 엄청난 돈을 지원해온 것이다. 따라서 중앙당 조직은 크게 줄이고 싱크탱크만 남겨 미국식의 원내 중심 정당으로 가면 보조금이 절로 필요 없어진다. 이와 함께 조직선거, 돈선거가 될 수밖에 없는 현행 소선거구 제도도 손보면 된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사퇴 이후 새누리당의 개혁 성향 의원들이 위축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당에 자생적 혁신 움직임이 약해졌다. 매너리즘에 빠진 듯하다. 여기서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얘기한 ‘권력과 정치의 이혼’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행정부)은 기업이나 글로벌 시장세력 때문에 위축되고 정치(국회)도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해 불완전한 결정을 내리는 데 그치고 있다. 따라서 반드시 여야가 구동존이(求同存異·차이점을 인정하면서 같은 점을 추구함) 정신으로 연대하는 연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연정 실험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하면 한국 정치 전체의 모델로 확산할 수 있다.”

 -남 지사는 박 대통령도 부총리 중 하나는 야당에 주면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그런 방식이 대통령제에선 어려운 게 사실이다. 대통령제는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구도라 야당이 정부·여당의 권력에 참여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인테그래넘’의 시대에 있다. 왕이 죽고 다음 왕이 즉위하기 전의 과도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고도성장 발전모델은 한계에 봉착했지만 새 국가모델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구조적 전환기에 있다. 연합정치와 포용 성장을 중시하는 리더십으로 바뀌지 않으면 청년실업과 세계 최고 수준인 자살률을 해결하지 못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 꼭 받아들이지 못할 제안만도 아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요동치고 있다.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은 문재인 대표가 재신임을 물을 정도로 내분이 심각하다.

 “내년 총선을 놓고 세 가지 관전 포인트가 있다. 우선 야당은 달라진 환경에 걸맞게 진보·중도 정치를 어떻게 재편할 것이냐 하는 투쟁이 본격화한 것으로 봐야 한다. 현재의 내홍을 단순한 권력 투쟁으로만 보면 안 되는 이유다. 여당은 공천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오픈프라이머리로 가느냐, 아니면 전략공천을 남겨두느냐 같은 논란을 단순히 당내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논쟁을 통해 우리 정치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계기가 생겨야 한다.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제3세력의 등판이다. 여야를 넘어 새로운 정치주체를 원하는 국민의 욕구가 많이 축적돼 있다. 안철수 현상에서 이미 드러난 이런 욕구가 내년 총선에서 또다시 분출할지 지켜봐야 한다.

 -여당이 오픈프라이머리를 추진하고 있지만 이견도 만만치 않다.

 “여당이 마냥 공천제를 놓고 시간만 끌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천 제도가 불확실한 상태다 보니 당내에 불필요한 권력다툼이 일어날 소지가 커진다. 공천을 놓고 여러 가지 억측이 이미 나오고 있지 않느냐.”

 -오픈프라이머리에 찬성하나.

 “우리 정치의 미래를 생각하면 굉장히 제한적인 제도다. 하향식 공천 위주인 지금보다는 낫지만 정치개혁이 이뤄질수록 실효성은 낮아진다. 미국식 대통령제를 유지한다는 전제에서만 의미 있는 제도다. 또 현행 소선거구제에선 현역 의원의 프리미엄만 강해질 것이란 우려도 감안해야 한다.”

 -새정치연합이 내놓은 공천개혁안은 어떤가.

 “국민이 참여하는 오픈프라이머리가 아니라 선거인단 일부만 참여하는 오디션식 공천이다. 상향식이란 점에선 긍정적이나 역시 한계가 분명하다.”

 -개혁보수세력이 새누리당을 이끌 수 있나.

 “개혁을 지향하는 흐름은 여야를 막론하고 강화될 것이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극좌나 극우는 다수 의석 획득이나 집권이 불가능하다. 자연히 중도 수렴 현상이 이어질 것이다. 흥미로운 건 지난해부터 여야 당대표 연설을 보면 포용 성장, 연합정치 같은 중도 개혁적 담론을 공통으로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생각은 개혁적인데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게 문제다.”

 -성폭행 혐의로 수사받는 심학봉 의원이 제명 요구를 묵살하고 버티고 있다. 국회 사무총장으로서 어떻게 보나.

 “공직자의 윤리는 자신을 향해야 한다. 평판과 명예로 사는 직업이다. 더 이상 공직을 수행하기 어려워지면 과감히 직을 던지는 게 바른 태도다. 국회란 집단 전체를 욕보이는 일 아닌가. 절차에 따라 제명당하기 전에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국회가 그의 의원직 사퇴를 강제할 수단은 없다.”

 -국회에 우리나라의 미래를 구상하는 ‘미래연구원’ 설립을 추진 중인데.

 “우리나라는 발전 수준에 비해 미래전략을 연구하는 기능이 약하다. 1970년에 태어난 국민이 100만, 80년엔 80만, 90년엔 70만에서 점점 줄더니 2005년부터는 40만 명 아래로 떨어졌다. 2005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어른이 되는 2023년께 되면 나라의 모든 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5년 단임 대통령이 그런 미래까지 생각하고 대비하긴 어렵다. 반면 국회는 보다 지속성이 있다. 또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는 연구를 조율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국회 안에 ‘미래연구원’을 설립하려는 것이다. 다양한 전문가를 모아 국가 미래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이를 바탕으로 여야가 나라의 중장기 과제에 대해 합의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여야 모두 긍정적이라 올해 안에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목표다.”

 -저서에서 ‘공진’을 주장했는데 야권과도 논의해봤나.

 “새정치연합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에서 ‘공진’을 주제로 강의한 적이 있다. 야당의 많은 분들이 공감하더라. 그리스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우파는 복지, 좌파는 선진국의 긴축 압박을 들지만 실은 공공 분야에 대한 여야 정치권의 포퓰리즘 지원이 진짜 원인이다. 나라 경제에 활력이 없으니까 정치권이 공공 부문을 계속 늘린 게 화근이 됐다. 그리스가 공무원 연금에 지급하는 돈은 스페인의 두 배가 넘는다. 예산 100조원 중 50조원이 공공 부문에 들어간다. 공무원이 기득권층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그리스는 경제혁신이나 성장을 위한 노력이 굉장히 부족한 나라가 됐다. 이는 우파의 논리일 수 있지만 좌파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파는 성장 논리만, 좌파는 복지 논리만 강조한다. 서로 한쪽만 보고 있다. 내가 ‘공진국가’를 주창한 건 좌우파 모두 동태적 균형 감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여당과 청와대의 당·청 관계는 어떻게 보나.

 “앞으로의 당·청 관계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국회의 기능이 강화되고 민주화되면서 말 그대로 수평적 관계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됐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임기 5년이 짧다. 그러므로 말 잘 듣는 여당을 원한다. 그런 인식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지금은 과거의 ‘힘의 논리’가 아닌 소통과 설득·공감이 필요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당 원내대표가 ‘야당이 반대해 법안 통과가 어렵습니다’라고 얘기하면 어떻게 반응했나.

 “아쉬운 점 중 하나다. 이 전 대통령 자신은 야당과 대화하고 싶어했고 그런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사실 잘되진 않았다. 여야가 선거를 앞두고 늘 강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또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관철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했다. 그래서 야당과 충돌이 잦았다. 대통령의 선택은 대통령 본인의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이 전 대통령의 스타일은 실무 중심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매사 일을 성사시키는 걸 우위에 뒀다.”

 -내년 5월 31일이면 19대 국회가 종료된다. 그 뒤 거취에 대해 얘기해 달라.

 “지역구는 현재 떠난 상황이다. 내년 총선에 출마하는 건 내 생각의 중심이 아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서 한국 정치의 구조적 변화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몫이 얼마나 될지가 중요하다. ”

글=강찬호 논설위원
사진=김상선 기자

박형준 총장은 … 1960년 부산 출생. 대일고와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동아대 교수와 미국 스탠퍼드대 교환교수를 지냈고 부산 경실련에서 기획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한나라당 대변인을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기획관·정무수석비서관·사회특보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