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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떠나자 구명조끼 벗고, “배에선 안 취해” 소주 벌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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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11일 밤 전남 완도군 여서도와 제주시 우도 사이 해상에서 낚시꾼들이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아이스박스에 걸터앉아 갈치 낚시를 하고 있다. [김호 기자]

허술하기 짝이 없는 승선자 명부 작성, 해경의 형식적인 점검, 출항 후에도 구명조끼를 입지 않는 탑승객, 밤새 이어진 술판. 지난 11~12일 충남 태안·보령과 전남 완도에서 본지 기자들이 직접 낚싯배를 타고 1박2일 동행 취재한 결과 돌고래호 사고 이후에도 바다에서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명조끼는 낚시하는 데 거추장스러울 뿐이니 벗어두세요. 죽을 일 전혀 없어요. 설령 죽어도 모두 같이 죽는 겁니다. 하하하.”

 지난 11일 오후 6시쯤 갈치 어장이 형성된 전남 완도군 여서도와 제주시 우도 사이 해상. 낚시꾼과 선장·선원 등 22명이 탄 갈치 낚시어선 W호(9.77t)에서 선원 한 명이 기자에게 “구명조끼는 왜 입고 있느냐”며 말을 건넸다. 이 배에서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은 기자와 다른 낚시꾼 한 명뿐이었다. 구명조끼가 선실 입구 목재함에 비치돼 있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몇몇 낚시꾼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어선 옆쪽의 좁은 통로에 놓인 아이스박스에 걸터앉아 소주를 마셨다.

 조금 뒤 어장에 도착한 배가 속도를 줄이자 큰 너울이 일며 어선이 심하게 흔들렸다. 뭔가를 붙잡고 있어도 몸의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였지만 안전을 걱정하긴커녕 밤새 낚시에만 열중했다. 선원들도 탑승객 안전은 뒷전이었다. 선실에 들어가 잠을 자는 선원도 있었다. 12일 오전 5시쯤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고 굵은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아무도 구명조끼를 착용하려 하지 않았다.

 승선인 명부 작성과 확인 절차도 엉터리였다. 명부는 W호에 타기 직전 현장에서 적지 않고 출항 30~40분 전에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낚시점포에서 미리 작성했다. 점포 측은 손님들이 직접 적도록 했을 뿐 본인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출항 직전 완도해양경비안전서 소속 해경 한 명이 배로 찾아왔지만 인원 수만 세어보고 금세 돌아갔다.

 12일 오전 4시 충남 태안군 안흥항. 해경 한 명이 휴대용 확성기를 들고 다니며 “안전을 위해 구명조끼를 입어야 합니다” “음주는 절대 금지입니다”라고 안내방송을 했다. 하지만 낚시꾼들은 본체만체했다. “갑자기 왜 이러느냐”며 항의하는 선장들도 있었다. 오전 4시30분 승선자 명부를 든 해경이 배에 올라 인원을 확인했 지만 주민등록증 등 본인 확인 절차는 전혀 없었다. 승선자 명부도 오전 3시쯤 낚시점포에서 작성했 다. 동료와 같이 온 40대 남성은 혼자 2명의 인적 사항을 적었지만 무사통과였다.

 이날 안흥항에서는 낚싯배 34척에 495명이 타고 바다로 나갔다. 기자가 탄 Y호(6.77t)에는 선장을 포함해 16명이 탑승했다. 오전 5시 배가 포구를 출발하자 네 명이 구명조끼를 벗어던졌다. 1시간30분 뒤 궁시도 인근에 도착하자 두 명이 더 구명조끼를 벗었다. 낚시하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단합대회하러 왔다는 직장 동료 다섯 명은 포구를 빠져나온 직후부터 입항 때까지 11시간 동안 아이스박스 2개에 담긴 맥주와 소주를 모두 마셨다. 이들은 “배 위에서 마시면 취하지 않는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11일 오후 2시 충남 보령시 오천항. 낚싯배들이 잇따라 포구로 들어왔지만 구명조끼를 입은 탑승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성과 어린이가 탄 배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5시까지 입항한 32척 중 탑승객 전원이 구명조끼를 입은 배는 나폴리호(9.77t·22인승)가 유일했다. 나폴리호 선장 김준호(36)씨는 “사고는 한순간에 발생하며 구명조끼는 생명과 직결되니 덥고 불편해도 참아달라고 몇 번씩 얘기하면 결국엔 따라준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승객이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다가 해경에 적발되면 선장에게만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이에 따라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은 승객에게 직접 과태료를 물리는 내용의 법률개정안이 제출됐지만 8개월째 국회 상임위에 계류돼 있는 상태다. 현행법에는 승객의 신원 확인도 의무화돼 있지 않다.

 해양수산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승선자 명부를 제출하기 전 신분증 확인을 의무화하는 등 종합대책을 마련해 이달 중 발표할 예정이다. 대전대 박충화(안전방재학부) 교수는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국민들이 ‘설마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제도 마련과 관리·감독 못지않게 스스로 법을 지키려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태안·보령·완도=신진호·김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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