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전승 공정’이 시작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베이징 특파원

전승절 열병식이 펼쳐지던 3일 중국 각지에서 ‘카이로선언’이란 영화가 개봉했다. 1943년 루스벨트와 처칠, 장제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세계 질서를 논의한 뒤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발표한 선언에서 제목을 따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네티즌들로부터 “초보적인 역사 지식도 없느냐”는 질타를 받았다. 영화 포스터에 마오쩌둥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중국 동북지방과 대만 반환을 확인한 카이로선언의 주역 자리를 장제스가 아닌 마오가 떡하니 꿰찬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건 역사적 사실이다. 주더(朱德)의 팔로군은 제갈량 뺨치는 신출귀몰 전술로 일본군에 연전연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는 ‘적후(敵後)작전’, 즉 후방에서의 교란 또는 협공작전이었다. 최전선에서 정규전을 치른 건 국민당이었고 중국 대륙에서의 항일 주역은 누가 뭐래도 장제스였다. 공산당의 역할을 폄하해서도 안 되겠지만 카이로선언처럼 팩트가 분명한 일에 주연과 조연이 바뀌어선 곤란하다.

 이 영화 외에도 중국에선 여러 편의 항일전쟁 영화가 전승 70주년을 맞아 동시에 개봉됐다. 오락프로 중단 지시를 받은 TV는 기록영화와 관련 드라마를 반복해서 틀었다. 서점에는 관련 서적 수십 종이 새로 깔렸다. 그중 당국의 공식 출판물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중국이 항일전쟁사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전승 공정’이라 이름 붙일 만한 프로젝트다. 필자가 보기엔 여태까지 ‘항일’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올해엔 ‘반파시스트’ 전쟁에 대한 중국의 공헌을 강조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최근 등장빈도가 부쩍 높아진 ‘동방 주전장’이란 개념은 그 실례다. 서방 주전장인 유럽 대륙과 마찬가지로 중국대륙은 반파시스트 전쟁의 주무대였다는 것이다. 항일전쟁기념관에는 “중국은 14년간 반파시스트 전쟁을 치렀다”며 미국(3년9개월), 소련(4년2개월)과 비교하는 그래프가 새로이 걸렸다. “31년 9·18 사건으로 시작된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국지항전이 반파시스트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는 해석에 따른 것이다. “37년 노구교 사건에서부터 세계 최초의 ‘대규모’ 반파시스트 전쟁이 시작됐다”는 기술도 나온다. 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고 보는 통념보다 더 확대된 개념이다.

 항일이건 반파시스트건 중국에서 강조되는 건 공산당 계열의 팔로군과 신사군의 전투다. 국민당의 항일을 부각시키지 못하는 게 중국의 정치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결론으로 이어진다.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싸운 중국인민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결정적으로 승전에 기여한 주역이란 것이다. 이런 해석이 타당할지는 몰라도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류를 파시즘의 질곡에서 구한 제2차 세계대전 주역이란 명예를, 나아가 세계사의 주역이란 지위를 나눠 갖자고 중국이 미국 중심의 서방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영준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