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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연봉 삭감 바람

중앙일보

입력

3일 3대 금융그룹(신한·하나·KB국민) 회장이 연봉 30%를 삭감키로 한 데 이어 4일 3개 지방은행 회장이 연봉 20%를 줄이기로 했다. 여기에 우리은행 등 나머지 시중은행장도 주중에 동참 선언할 것으로 보여 금융권에는 경영진의 연봉 삭감 바람이 불고 있다.

이렇게 금융 경영진이 연봉을 자진 반납하기로 한 건 청년 고용 때문이다. 이들은 이렇게 마련된 재원으로 신규채용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과거에도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신규 채용을 늘린 사례는 있다.

세계 금융 위기가 이어지던 2009년 시중은행은 직원의 임금을 삭감해 신규 채용을 늘리는 카드를 꺼냈다. 정부의 정책 방향에 부합했다는 점에서도 현재의 임금 삭감 움직임과 닮은 꼴이다. 하지만 다른 게 있다. 경영진 임금을 삭감한 사례도 있지만 당시엔 신입직원 임금 깎기에 주력했다. 정부는 비상경제 대책회의를 통해 ‘대졸 초임 인하를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논의했고, 공기업을 중심으로 대졸 초임 깎기 바람이 일었다. 시중은행도 동참했다. 은행별로 신입 초임은 700만~1000만 원씩 줄어들었다.

임금 삭감은 실적 개선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은행은 2009년 일반직원은 5%, 신입직원은 20%의 임금을 줄였다. 이듬해 KDB대우증권이 내놓은 우리금융·우리은행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금융은 임금 삭감과 경비 절감 노력을 통해 판관비(회계상 급여·복리후생비 등 포함된 항목)가 전년보다 7% 줄었다. 총영업이익은 전년보다 20.5% 늘어났다. 하지만 잃은 것도 많다. 은행 내 세대 갈등이 촉발됐다. 초임이 삭감된 세대를 두고 ‘6두품 행원’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2011년엔 신입 은행원은 임금 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총파업을 예고했다. 결국 이듬해인 2012년 3년 만에 이들의 임금은 원상 복구됐다.

이번에는 ‘회장님 연봉 삭감’이 직원 임금 삭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작다. 김인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은행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있지만 지속적인 명예퇴직으로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데다 재정건전성도 2009년보다는 안정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회장의 연봉 삭감은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한 선제 대응이자 기업 이미지를 높이려는 행보”라고 말했다.

정부와 금융당국도 금융그룹 회장의 연봉 반납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번 임금 삭감 등을 계기로 은행권의 항아리형 인력 구조를 피라미드형으로 바꿔야 한다고 보고 있다. 고임금·비효율 논란을 불러온 현재의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를 성과연동형으로 바꿔야 청년고용을 늘릴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금융그룹 회장의 연봉 반납이 상징적 효과는 있어도 근본 대책은 될 수 없다”며 “임금피크제 확대와 성과에 따른 배치 전환, 계약 해지 제도를 통해 효율성을 높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이런 판단을 한 건 그동안의 단순 인력 구조조정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은행권 인력은 현재 11만8000명으로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15만명)보다 3만명 이상 적다. 은행이 인력 감축으로 비용을 줄여 수익성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도 “저금리 기조의 장기화를 감안하면 인력 감축만으로는 수익성을 높일 수 없다”며 “임금체계 개편과 함께 은행 스스로 수익성 강화를 위한 특화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다만 은행이 ‘소나기를 피하자’는 식으로 외부 환경이 열악할 때만 임금 삭감 카드를 꺼내기보다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김용태 의원(새누리당·정무위)은 “위기의 본질은 금융사가 지금까지 돈을 벌어왔던 수익 구조가 한계에 달했다는 점”이라며 “신규 고용을 위한 일시적인 방편보다는 금융 혁신과 구조조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우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외국 은행의 경우 인건비 대비 영업이익이 대체로 일정 수준에 고정돼 있어 영업이익이 오르면 그만큼 더 주고, 이익이 내리면 그만큼 줄이는 구조”라며 “특히 연봉 많이 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익에 따라 조정되는 성과급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병철·이태경·김경진 기자 bong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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