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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인데도 응급실에서 아우성치는 사람은 없었다. 18일 런던 템스 강변 웨스트민스터 브리지 인근의 세인트 토머스 종합병원 응급실. 입구엔 “먼저 간호사를 만나세요”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이날 전광판엔 “처치까진 1시간 반 걸립니다”라고 안내돼 있었다. 대기 시간은 아픈 환자들에게 가장 예민한 문제다. 병원은 해법으로 우선 ‘색깔’을 내놓았다. 침상 위에 붙은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 카드만 봐도 나와 남의 위급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응급실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연간 1만3219건. 이로 인한 손실만 6900만 파운드(약 1239억원). 영국은 골칫거리 응급실 문제 해결을 위해 뜻밖에도 ‘디자인’이란 카드를 꺼냈다. 응급실의 프로세스와 혼잡도에 대한 정보를 눈에 띄는 디자인을 통해 알렸다. 효과는 컸다. 두 병원에서 시범운영한 결과 위협적 제스처가 절반으로 줄고, 공격적 행동은 23%나 줄었다.
디자인에 대한 기대가 제품에서 서비스로 바뀌고 있다. 2000년대 접어들며 ‘서비스 디자인’의 영역 확장이 두드러진다. 보기 좋은 물건 제작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부족한 삶의 빈칸’을 디자인을 통해 채워 가는 식이다. 영국 왕립미술학교와 왕립대가 공동 설립한 의료서비스 전문 스튜디오 헬릭스센터에서는 비만 어린이를 위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카드 게임을 개발해 효과를 봤고, 아동 천식 환자들의 폐활량 테스트를 돕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도 개발했다. 영국 러프버러대 전규찬 교수는 "인간이 가장 예민해지는 곳이 병원이다. 디자인을 통한 작은 변화로 더 나은 행동을 이끄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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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디자인은 어떤 식으로 인간의 삶과 행동을 바꿀까. 가령 에너지 절약을 위해선 캠페인이나 인센티브·제재가 효과적일까. 서비스 디자인은 색다른 해법을 내놓는다. 한국에너지공단은 아파트 고지서 디자인을 바꿨다. 고지서만 봐도 단지 내에서 우리 집이 전기를 얼마나 쓰는지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끔 했다. 석 달간 실험하자 서울 방배동의 588가구 아파트에서 평균 10%의 전기 사용이 절감됐다. 전국으로 확산하면 연간 약 7600억원을 절약할 수 있다. 이미 800만 가구가 바뀐 고지서를 받고 있다. 디자인 개발에 참여한 서비스디자인연구소 SD랩 최미경 대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디자인적 사고를 통해 우리의 사회를 바꿀 수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과거 디자인은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포장이었다.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디자인 단체의 행사에 참석해 ‘미술 수출’이라고 썼다. “수출을 늘리려면 디자인과 포장이 개선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함으로써 ‘수출 경제’의 앞머리에 디자인을 내세웠다. 한국공예문화진흥원의 전미연 팀장은 “당시의 디자인은 국부를 늘리는 도구였다. 반면 오늘날의 디자인은 삶의 질을 높이는 도구다”고 설명했다. 산업화와 도시 개발이 휩쓸고 간 자리에 ‘디자인’이란 화두가 서 있다. 상품을 사라고 유혹하던 디자인이 이제 우리의 삶과 행동을 바꾸기 시작했다.
권근영 기자, 런던=이영희 기자 yo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