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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441>항일의용군 지휘 넘겨받은 자오퉁, 팔로군에게 피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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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군 시절의 자오퉁(왼쪽 네 번째). 왼쪽 세 번째가 양청우. 다섯 번째는 훗날 한국전쟁 시절 중공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덩화(鄧華). [사진 김명호]

덩톄메이(鄧鐵梅·등철매)를 계승한 먀오커슈(苗可秀·묘가수)는 일본에 붙어먹은 중국인(漢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옛 부하들이 비슷한 구술을 남겼다. “요동 삼각지의 의용군을 토벌하던 일본군이 덩톄메이에게 담판을 제의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 담판은 화기애애했다. 두 번째는 먀오커슈가 대표를 자청했다. 안심하고 나온 일본군 대표 다섯 명을 쏴 죽였다. 애걸하는 중국인 통역은 절벽에서 던져버렸다.”

1935년 6월 13일, 먀오커슈는 부하들과 함께 마을에 야숙했다. 민가 10여 호가 있는 작은 마을에 일본의 첩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들이닥친 일본군과 8일 간 격전을 치르다 중상을 입었다. 행군이 불가능해지자 대학 후배 자오퉁(趙?·조동)에게 총구를 겨눴다. “도주해라. 거역하면 죽여 버리겠다.”

포로가 된 먀오커슈는 중국인 통역의 배석을 거부했다. 먀오를 흠모하는 일본군 장교가 지필묵을 들고 와 유언을 청했다. 즉석에서 '정기천추(正氣千秋)' 네 자를 남겼다.

7월 25일, 일본군은 먀오커슈를 감옥에서 끌어냈다. “네가 죽인 담판 대표들의 기념비 앞에 무릎 꿇고, 가족들에게 사과하라”고 윽박질렀다. 먀오는 끝까지 거절했다. 에워싼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곡(哭)소리가 터지자 일본군은 당황했다. 먀오를 숲 속으로 끌고 갔다. 잠시 후 총성이 울렸다. 훗날 중국정부는 먀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았다. 희생된 자리에 학교를 세웠다. '먀오커슈 중학'이라고 명명했다.

감옥을 턴 죄로 총살되기 직전의 의용군들. 1937년 12월 치치하얼. [사진 김명호]

덩톄메이에 이어 먀오커슈마저 세상을 떠나자 요동 삼각지의 의용군은 방황했다. 자오퉁이 지휘권을 장악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일본군이 동북을 침략했을 때 자오퉁은 동북대학 물리학과 1학년이었다. 저항을 포기한 국민당 정부에 실망을 느끼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수도 난징에 가 시위에 참여하고 동북학생군을 조직했다. 크게 한 일은 없었지만, 동북 출신들이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와 조직한 최초의 항일단체였다.

자오퉁의 모친 홍원궈(洪文國·홍문국)는 소문난 여장부였다. 평소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다. “워낙 평범한 사람이다. 어찌나 겁이 많은지, 일본 사람 보면 비실비실대며 피하기만 한다. 그럴 때마다 울화통이 터지고 사는 재미가 없다. 누구네 집 남편이 항일 의용군 나갔다는 말 들을 때마다 창피해서 못살겠다. 아들이 아버지 안 닮아 천만다행이다.” 자오퉁이 덩톄메이의 의용군에 가입하겠다고 하자 “네 덕에 얼굴 들고 다니게 됐다”며 기뻐했다.

자오퉁은 먀오커슈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소년철혈군'을 지휘했다. 일본군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자오퉁의 부모를 인질삼아 투항을 권했다. 거절당하자 자오의 수중에 있던 한간 1명과 교환했다.

1936년 1월 '랴오난임시정부(遼南臨時政府)'를 조직했다. 1930년 7월에 설립된 조선혁명군과 합작했지만, 워낙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라 오래가지 못했다. 출로를 모색하던 자오퉁은 소수 정예들과 함께 산하이관을 넘었다.
1937년 7월 7일, 베이핑 교외에서 중·일 두 나라 군대가 충돌했다. 자오퉁은 항일 근거지 물색에 나섰다. 장소를 우타이산(五臺山)으로 정하고 무기와 인력 확보에 나섰다. 우선 동북대학생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했다. 24명을 거느리고 칭화(淸華)대학 담을 넘었다. 국민당 정부가 숨겨뒀던 무기와 실탄을 귀신도 모르게 탈취했다.

인력은 감옥에서 구했다. 8월 22일 밤, 베이핑 제2감옥 문전에 어린 소년이 달려왔다. 숨을 헐떡이며 “일본군 장교가 온다”고 외쳐댔다. 이어서 일본 군관이 통역과 함께 나타났다. “중국인 정치범 수용 상태를 점검하러 왔다.”

감옥문을 연 경비병은 시꺼먼 총구에 경악했다. 간수는 순순히 열쇠를 내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20여명이 들이닥쳤다. 경보기와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무기를 압수했다.

자오퉁은 죄수 580여명을 모아놓고 선언했다. “우리는 의용군이다. 항일을 하려면 우리와 함께 가자.” 간수 7명을 포함해 300여명이 자원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감옥이 털리기 시작했다. 동북이 특히 심했다.
대오를 갖춘 자오퉁은 '국민항일군'을 출범시켰다. 동북 출신 학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9월 8일,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12대의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은 참패했다.

국민항일군의 명성은 국내외를 진동시켰다. 화교들이 프랑스에서 발간하던 구국시보(救國時報)는 “베이핑 교외에 있는 항일의 중심세력”이라며 국민항일군과 사령관 자오퉁을 추켜세웠다.

중공은 자오퉁을 경계했다. 팔로군 간부 양청우(楊成武·양성무)를 내세워 회유했다. 자오퉁은 단순했다. 국민항일군을 팔로군에 편입시켰다. 국민항일군을 끌어안은 중공은 자오퉁의 입당 신청을 거절했다. 대신 부사령관 두 명의 입당은 수락했다.

자오퉁은 200여명을 데리고 딴 살림을 차렸다. 상황을 보고받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자오에게 '화베이(華北) 국민항일군사령관' 임명장을 보냈다. 1939년 가을, 이동 중이던 자오퉁은 낯선 부대의 습격을 받고 사망했다. 최근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팔로군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자오퉁의 사망으로 요동 삼각주의 항일의용군은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를 동북항일연군이 차지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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