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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소싯적 잘못에 대한 반성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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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 영화는 프랑스 시장의 65%, 이탈리아 시장의 85%, 독일 시장의 90%, 영국 시장의 거의 전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모자랍니까?"

"그러니 미국 영화 상영에 쿼터를?"

"유감이지만 미국 영화의 완전 점령을 제한하는 조처가 필요합니다. 당신들은 일본 차 수입에 여러 제한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차보다 훨씬 더 중요한 대상, 즉 문화를 지키려는 보호 규정이 그토록 해로운 행위입니까?"

*** 스크린 쿼터와 韓.美투자협정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직후 프랑스 영화 감독 코스타-가브라스는 한 미국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반문했다. 결국 '유럽판 스크린 쿼터'의 필요를 역설한 것이다.

거꾸로 국내에서는 지금 스크린 쿼터 축소 논란이 한창이다. 관객한테서 선택의 자유를 빼앗는 제도라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작은 이익을 취하려다 큰 것을 잃는다는 경고도 있다.

자동차 수입처럼 영화 수입과 상영도 자유 방임하라는 앞의 문화 개방 확신범(!)은 어떻게 말릴 도리가 없다. 그러나 뒤의 소탐대실(小貪大失) 설교에는 의문이 있다. 여기 소탐은 스크린 쿼터 유지이고, 대실이란 한.미투자협정(BIT) 표류다.

한.미투자협정이 과연 그토록 절박한 현안인가? 미국과 투자 협정을 맺은 상대는 주로 동유럽의 체제 전환국과 제3세계의 최빈국들로 제법 변변한 나라가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는 한 나라도 없으며, 막말로 "얼마를 뜯어가도 좋으니 제발 돈만 가져오라"고 매달리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그 명단을 훑어보면서 거기 들어가기보다 차라리 빠지고 싶다는 심정이 앞섰다.

저쪽에서 재촉해도 뭉그적거려야 정상인데,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분명 김대중 정부의 실책이었다. 당시의 외환 위기가 변명일 수 없는 것은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미국과의 투자 협정없이 위기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협정 체결로 40억달러의 투자 유치 효과가 생긴다는 '산술'도 희한하지만, 지금 우리 경제의 덜미를 잡는 화상은 외자 부족이 아니다. 증시와 투기판을 멋대로 치고 빠지는 3백80조원-약 3천억달러-의 부유(浮游) 자금을 밀어놓고 외자 타령만 하는 것이 어쩐지 내게는 정책 당국의 직무 유기로 보인다.

투자 협정과 스크린 쿼터는 전혀 별개 사안이다. 미국이 만든 협정 표준안에는 '의무 이행 강제'에 대한 금지 조항이 있는데, 스크린 쿼터의 의무 이행이 여기에 걸린단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일방적 제안이므로 협상을 통해 조정해야 한다. 국내의 영화 배급과 제작에 진출할 외국 자본은 스크린 쿼터의 이해 득실을 꼼꼼히 따질 것이다.

그러나 외국 은행이나 자동차 회사는 한국의 스크린 쿼터를 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미 수출 3백30억달러와, 미국 영화의 국내 수입 2억달러 가운데 어느 이익이 더 크냐는 어느 관리의 질문은 그야말로 망발 수준이다.

현행 1백46일-실제로는 92일-의 스크린 쿼터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미국의 압력에 굴할 때, 단순히 방화(邦畵) 상영 일수만 그만큼 주는 것이 아니다. 배급이 반으로 줄면 제작은 몇곱으로 줄고, 그 악순환에서 국내 영화 산업은 조종을 울리고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만세를 부르리라.

서푼짜리 애국심으로 우리 영화를 보고, 스크린 쿼터 장벽으로 국산을 보호하자는 말이 아니다. 섣부른 경제 계산으로 문화의 장래를 요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코스타-가브라스는 정신은 판매 대상이 아니고(not for sale), 문화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not for negotiation)고 했다.

*** 역사.의식까지 수출한 영화인데

게리 쿠퍼나 존 웨인이 열연하는 '서부 사나이'는 어린 시절 우리의 우상이었다. 백인의 인디언 사냥은 정의였고, 영토와 생존을 지키려는 인디언의 저항은 악행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역사와 의식도 수출했다. 경제 문제를 끼적이는 내가 분수없이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이렇게 철모를 때 지은 죄(?)에 대한 후회와 반성 때문이다.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문화가 무역에 굴복하면 안된다"면서 영상 분야의 '문화적 예외'를 거듭 강조했다. 교역의 예외적 특성으로 WTO가 허용하는 비교역적 관심(NTC)은 쌀시장 개방 못지않게 극장 개방에도 절실하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