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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인 줄 알고 엄마라도 살리려 했는데 자궁속 아기 손이 내 손을 꽉 잡았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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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산부인과 전문의 이선영씨가 지난해 6월 파키스탄 티머가라에서 흰색 히잡(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카락 등을 가리기 위해 쓰는 스카프)을 쓴 채 신생아를 안고 있다. [사진 국경없는 의사회]

지난해 여름 파키스탄. 국제인도주의 의료구호단체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산부인과 전문의 이선영(48·여)씨는 한밤중에 도움을 청하는 다급한 목소리에 진료소 문을 열었다. 출산이 임박한 여성이었다. 여성을 살펴보니 아기의 팔 하나만 빠져나와 있었다. 그 팔은 이미 꺼멓게 변해 있었다. 이씨는 사산(死産)이라 생각했다, 아기를 빼내기 위해 자궁 안으로 조심스레 손을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기가 다른 한 손으로 이씨의 손을 꼭 잡았다. 한 팔을 잃고도 아기는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이씨는 산모와 아기 모두를 살린 이 순간을 기적으로 기억한다. 세계 인도주의의 날(8월 19일)을 하루 앞둔 1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국경없는 의사회 한국 사무소에서 이씨를 만났다. 그는 “인도주의라고 하면 테레사 수녀님 같은 분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한국의 종합병원이든, 밖에서 총소리가 나는 진료소이든, 내가 하는 의료활동으로 환자가 만족하면 의사로서 그 이상의 기쁨은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가톨릭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석·박사를 취득했고, 하버드 의대 연구원을 거쳐 분당 차병원에서 부인암센터 교수로 일해왔다. 구호활동에 뛰어든 것은 2012년이다. 이씨는 “명의로 유명해지는 게 많은 의사들의 바람일 텐데 어느 순간 그게 멋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말도 못하고 속이고 사는 게 ‘찌질’하다고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그는 “내 의술을 창피하지 않게 쓸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이때 오지 봉사를 택한 것이 큰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한국에선 헤모글로빈 농도가 50% 정도면 심각한 빈혈인데, 처음 파견됐던 나이지리아에서 농도가 10%인 10대 소녀 임부를 만났다. 말기암 환자보다도 심각한 상태였다”며 “그런데 무사히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더라. 이걸 말릴 수도 없고, 모성을 다시 느꼈다”고 했다.

 2013년 라오스에선 산길에서 아기를 받았다. 깊은 산 속에 사는 산모가 겨우 길가까지 나와 의료진을 만났다.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아기 하나가 나오고 나서 며칠이 지나도 다른 아기가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이씨는 “해는 지고 불빛 하나 없는 수풀 속에서 아기를 무사히 받았다.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 의료진은 30여 명이다. 그는 구호활동을 망설이는 동료 의사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환자를 보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지도 않고, 환자가 나를 통해 만족스러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구호활동을 생각해보세요. 잃었던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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