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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칠생보국' 절대 충성, 막부 타도 앞장선 '구스노키 마사시게' 가문 상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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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도쿄의 황거(皇居) 앞에 서있는 구스노키 마사시게 동상(사진 위). 가이텐 잠망경에 부착된 기쿠수이(菊水) 문양. [사진=박보균 대기자]

기쿠수이(菊水)는 가이텐의 문양(紋樣)이다. 가이텐 어뢰정의 몸통 중간, 잠망경 양쪽에 붙어 있다. 그것은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1294 추정~1336년) 가문의 문양이다. 가이텐 기념관 안내책자는 이렇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新政)에 앞장섰다. 천황은 그에게 황실의 국화 문양을 하사했다. 그는 황송하다며 국화의 반쪽 아래에 유수(流水) 무늬를 넣어 가문의 문양을 만들었다. 문양은 천황에 대한 충절을 상징한다.”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은 쇼군(將軍)의 통치체제다. 1185년 가마쿠라(鎌倉) 막부 이래 무사정권 시대였다. 천황의 존재는 희미했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 고다이고(1315년 즉위)의 왕정복고 결행이다. 고다이고는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나섰다. 오사카 지방의 무장 마사시게가 충성을 바쳤다. 1331년 거병은 실패한다. 고다이고는 오키섬에 유배된다. 그 후 고다이고는 섬을 탈출, 막부를 무너뜨렸다. 1334년 고다이고의 겐무(建武) 중흥 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3년 뒤 권력은 분열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무로마치 막부 창건)가 반기를 들었다. 다카우지는 겐무 친정의 공신이다.

 마사시게는 교토 수호에 나선다. 그의 병력은 다카우지의 군대에 패배했다. 마사시게는 미나토가와(溱川, 지금의 고베)에서 자결했다. 마사시게의 존재는 막부 시대에 사라졌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메이지 유신의 체제 변혁이념은 존왕(尊王)과 막부 타파다. 마사시게는 그 행동 이념의 롤 모델로 부활했다”고 했다.

 마사시게의 삶은 신화로 재구성됐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다. 쇼인의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 임금 아래 만민 평등)은 마사시게 신화로 강화된다. 최혜주 한양대 연구교수(동아시아문화연구소)는 “메이지 시대를 장악한 조슈(長州)번의 쇼인 제자들은 일군만민론을 천황 중심의 군국주의로 구체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육·해군은 침략주의 황군으로 확장한다”고 했다. 제국 일본은 군부 우월 체제였다. 그 헌법적 기반은 통수권의 독립이다. 군부는 내각 위에 군림했다. 군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 집단이 됐다. 군부는 침공과 파국으로 나라를 몰고 갔다.

 마사시게 신화는 태평양전쟁 특공의 현장에 등장한다. 그는 숨지면서 ‘칠생보국(七生報國)’을 맹세했다. “일곱 번 거듭 태어나도 역적을 주살하고 주군에 보답하겠다.” 칠생보국은 가이텐과 가미카제 대원의 머리띠에 적혔다.

 마사시게의 동상은 도쿄의 황거(皇居) 앞에 있다. 도쿄에 3대 동상이 있다. 마사시게 동상(1900년 제막), 우에노 공원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동상(1898년), 야스쿠니 신사 입구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 동상(1893년)이다. 역사 가이드 우치다 씨는 “마사시게는 천황주의, 다카모리는 무사도 정신, 마스지로는 군국주의를 표출한다”고 했다.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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