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나는 이렇게 읽었다] 루쉰의 욕, 린위탕의 유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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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애써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역주의 '노신 문집'(일월서각, 1985) 여섯 권을 읽지 않은 사람도 루쉰(魯迅)의 이름은 알고 있을 터이다. 딜레탕트의 호사 취미에 잠시라도 젖었던 독자라면 린위탕(林語堂)이 '생활의 발견'(을유문화사, 1963)에 담아놓은 멋과 풍류를 잊지 못하리라. 루쉰은 1881년 생으로 린위탕보다 14년 연상이나 그들이 치열하게 대결했던 1920~ 30년대의 중국은 물론 현재도 문단의 쌍벽으로 우뚝하게 기억되고 있다.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적 신조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의 방법론이나 문예 운동의 지향까지 양인은 크게 대비된다.

팡시앙뚱(房向東)의 '루쉰, 욕을 하다'(휴먼필드, 2004, 432쪽, 1만3800원)는 당대의 작가와 지식인들에게 퍼부은 루쉰의 욕을-무례한 평론을-서술한 책이다. 1920년대 중반 린위탕은 "중국에는 '플레이' 정신이 매우 드물다. '페어' 정신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간혹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기를' 거부하는 경우에서 그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뿐"(258쪽)이라고 썼다. 여기 우물에 빠진 사람에는 패배한 군벌과 그의 어용 지식인도 들어간다.

이에 루쉰은 "물에 빠진 개들에게서도 사람 냄새가 나고 그들이 '페어'를 주장할 줄 알 때 페어 플레이를 시행해도 늦지 않다"고 받아쳤다. "개혁의 반대자들이 개혁자들을 해칠 때는 잠시도 느슨한 적이 없었고 그 수단의 혹독함도 이를 데가 없었다. 개혁자들만이 여전히 깊은 꿈속에 빠져 항상 손해를 보았다. 그래서 중국에는 개혁이 없었던 것"(259쪽)이라고 했다. 그 개한테서 지명 수배를 당한 뒤 린위탕은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자는 루쉰의 주장에 동조한다.

그러나 1930년대 돌연히 린위탕은 개잡이 '깡패' 기질을 청산하고, 고상한 취미 소유자를 위해 유머와 풍자 제작에 몰두하는 '신사'로 변신한다. 일제가 만주를 유린하고 전쟁 위협이 고조되는 속에서 기껏 흡연.음주.음다가 인류 역사상 가장 걸출한 발명이라고 예찬하는 따위의 파적으로 성령소품(性靈小品) 문학을 제창했다. 반면에 루쉰은 구국과 망국, 혁명과 반동의 갈림길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비수와 투창'이지 유머와 한적(閑寂) 타령이 아니라면서, 린위탕을 빗대어 중국인이면서 외국인인 척하는 '서양 똘마니' 몰골을 공격했다.

그러나 린위탕의 차녀 린타이이(林太乙)의 '현실+꿈+유머:린위탕 일대기'(휴먼필드, 2005, 724쪽, 1만9500원)는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다. 중국 청년의 영혼을 쟁취하려는 공산당은 그 공략에 넘어갈 대상으로 루쉰을 지목했고, 루신은 기꺼이 거기 투항했다는 것이다: "루신은 공산당이 진작부터 그들의 영웅각(英雄閣)에 자신의 위패를 모셔 놓으리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232쪽) 그들이 준비한 왕관을 받아 썼다고 혹평했다.

1936년 루쉰이 타계하자 린위탕은 '공산당 투항자'를 향해 "그와 지기가 된 것을 기뻐하였고, 루쉰이 나를 버렸을 때도 유감이나 후회가 없었다"(234쪽)고 애도했다. 생전에 루쉰도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후스(胡適)를 치고, 가장 훌륭한 산문가 셋 중의 하나로 '서양 똘마니' 린위탕을 꼽았다. 루쉰과 린위탕의 관계는 두 책 내용의 일부일 뿐이지만, 내게는 특히 그 험난한 시대에 그들이 나눈 '비판 속의 우정'이 몹시 부러웠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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