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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도 채권도 ‘팔자’ … 한국 비중 줄이는 외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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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를 검토하겠다.”

 2013년 5월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벤 버냉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한마디에 시장은 얼어붙었다. 원화 가치는 달러당 1160원을 넘어설 정도로 하락했고 코스피 지수는 1790 선까지 떨어졌다. 채권 가격도 급락, 국고채 3년물 금리가 11개월 만에 3%대까지 뛰었다.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을 살짝 내비친 것만으로 환율과 주식·채권 시장이 동시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장’이 펼쳐졌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흥국 시장은 이후 두 달여간 몸살을 앓았다. 이른바 ‘버냉키 쇼크’였다.

 이번엔 재닛 옐런 Fed 의장이 양적완화 규모를 줄이는 걸 넘어 기준금리를 인상하겠다고 예고했다. 다시 트리플 약세로 몸살을 앓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가장 먼저 환율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4일 서울 외환 시장에서 달러당 원화 가치는 1165.5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버냉키 쇼크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통화량이 줄면 달러화 값은 오르게 돼 있다. 달러화가 강세면 상대적으로 다른 통화는 약세일 수밖에 없다. 옐런 Fed 의장은 그리스 사태와 중국 증시 폭락 같은 악재에도 연내 금리를 인상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원화 값이 하락하면서 외국인은 주식을 팔고 있다. 지난달 외국인투자자는 코스피 시장에서 1조7912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6월 순매도 전환 이후 2개월 연속 사들인 주식보다 더 많은 주식을 팔았다는 의미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원화 가치 하락으로 환차손이 시세차익보다 커질 수 있게 되자 주식을 파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매도세가 이어지면서 코스피 내 외국인 보유 주식 비중은 28.94%로 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미국 금리 인상으로 신흥국 투자금 자체가 준다는 것도 악재다. 김형렬 교보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6월 이후 미국 내 신흥국 상장지수펀드(ETF)에서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다”며 “신흥국 중 비교적 경제 기초체력(펀더멘털)이 탄탄한 한국에선 마지막까지 자금을 빼지 않다가 최근 조정에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신흥국 펀드에서 자금이 빠져나가는 와중에 뚜렷한 성장 계기도 부재하고 외국인을 끌어들일 만큼 강력한 경기부양책도 없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채권 시장에서도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다. 지난달 말 외국인 보유 원화 표시 채권 잔액은 102조9739억원으로, 6월 말 대비 2조6345억원 감소했다. 순유출 규모는 전달과 비교했을 때 7.5배나 커졌다. 김지만 NH투자증권 연구원은 “8월 외국인투자자의 만기금액은 2조6000억원 규모로, 외국인 채권 잔액이 추가로 줄어들 전망”이라고 말했다.

 대외환경 역시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다. 다른 신흥국 시장은 상황이 더 안 좋기 때문이다. 연초 이후 통화 가치 하락폭이 가장 큰 6개 신흥국(터키·인도네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브라질·콜롬비아·말레이시아)의 통화는 10%가량 급락하면서 주식 시장도 2~14% 하락했다. 이들 국가만의 얘기가 아니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신흥국 지수는 올 들어 10.8% 떨어졌다. 안남기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미국 금리 인상을 앞두고 원자재 가격 하락, 중국 경기 회복 지연 같은 악재가 겹치면서 신흥국이 큰 타격을 받았다”며 “특히 이번에 하락폭이 큰 신흥국은 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커 위기가 다른 신흥국으로 전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자 증권사들도 코스피 지수 전망을 하향 조정하며 보수적인 투자를 권하고 있다. 김형렬 연구원은 “미 금리 인상이 확실시되고 있어 외국인투자자가 매수로 전환하는 시점을 추정하기 어렵다”며 “외국인이 돌아오지 않는 한 시장 반전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했다.

정선언 기자 jung.sun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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