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칼럼] 초저금리의 그늘, 빚쟁이 은퇴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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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기자

얼마전 노후준비와 관련해 재무상담을 받은 경기도 분당의 김모(50)씨 이야기다. 10년 째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였다. 2013년까지만 해도 내 집이 있었으나 식당을 넓힐 자금을 만들기 위해 처분하고 전셋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전셋값 오름세가 무서워 보유 자산을 전부 동원해 다시 9억원짜리 아파트를 장만했다. 구입 자금이 모자라 2억5000만원의 주택담보대출도 받았다. 대출금리는 2.7%로 원리금 합쳐 한달에 108만원씩 나가고 있다. 그러나 한 달수입이 평균 500만원 정도 되지만 자녀 교육비로 쓰기 위해 적금을 100만원씩 들고 있어 생활비가 부족했다. 결국 김씨는 50만원씩 마이너스 통장을 써야 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저금리 기조는 사람들에게 빚에 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은행 돈을 너무 가벼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부채 불감증이다. 김씨네는 3%짜리 은행 대출을 보유하면서 2%도 안되는 은행적금을 들고 있고 생활비 부족을 6%짜리 마이너스 통장으로 메우고 있었다. 얼핏 생각해도 한해에 4%포인트 금리를 손해보는 상황이다. 가만히 앉아서 재산을 까먹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금리가 센 마이너스 통장을 쓸 것이 아니라 정기적금을 해지해야 한다. 적금을 해지하면 약간의 불이익은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손해는 없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이 김씨네와 같은 선택을 한다. 그 이유는 사용목적이 다른 돈에 의미의 차이를 두기 때문이다. 같은 1000만원이라도 자녀의 교육자금과 생활자금은 다른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김씨네도 적금을 깨면 나중에 자녀의 교육비로 쓸 자금을 만드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지출은 줄이지 않고 부족한 생활비를 빚을 얻어 메웠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만일 나중에 자녀 교육비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그 때 빚을 얻어도 늦지 않다.

빚, 과다보다는 상환능력이 중요
누구나 생활하다 보면 빚을 쓰게 된다. 돈이 많이 들어갈 일이 있는 데 모아 놓은 저축금으로 부족하다면 일단 빌려서 메우고 나중에 갚을 수 밖에 없다. 내 집 마련이라든가 자녀교육과 결혼 등 중요한 이벤트를 치르는 데 돈이 모자란다면 빌리는 게 당연하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빚을 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걸 갚을 능력이 있느냐다. 벌어들인 소득으로 빚을 통제 범위 내에 묶어 둘 수 있다면 빚의 과다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빚이 없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건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이다.

문제는 저금리로 인해 부채에 무감각해지면서 상환능력을 벗어난 빚 얻기가 성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분기 기준 1100조원까지 늘어난 가계 부채가 그 증거다. 지난 해 정부가 부동산 시장 활성화 차원에서 대출 규제를 완화하자 주택담보대출이 가파르게 늘었다. 또 은퇴 생활로 접어들기 전엔 부채를 줄이거나 끄는 게 정상이지만 그냥 안고 넘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가계 부채의 상당부분이 고령층에 집중됐다. 모두 초저금리 현상이 빚어낸 그늘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작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가구주 연령이 50대인 가구가 전체 가계부채의 약 33%를 보유하고 있다. 60대, 70대까지 합치면 50%이상으로 늘어난다. 전체 가계부채 절반이상이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한 연령층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미국의 경우 50대 가구주는 전체 가계부채의 23% 수준에 그쳤다. 한국의 가계부채가 상대적으로 고령층에 집중돼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KDI는 미국의 경우 대출을 받더라도 원리금 균등상환의 장기 모기지를 택하지만 한국은 이자만 내다 일시상환하는 거치식 비중이 높아 퇴직 시점의 고령층 가계부채 부담이 크다고 분석했다.

은퇴이후엔 소득흐름이 왕창 줄어 원금과 이자를 상환할 능력이 떨어진다. 젊어서 일할 때는 급여형태든 사업소득이든 매달 정기적인 현금흐름이 발생하기 때문에 생활비와 대출금이자는 자기 힘으로 충당할 수 있다. 남는 현금흐름에 부채를 합쳐 자산도 축척할 수 있다. 그러나 은퇴후엔 목돈 적립보다는 지금까지 모아온 돈을 조금씩 빼 쓰면서 살아야 한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부채에서 발생하는 이자다. 퇴직이전에는 월급등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퇴직이후에는 노후 생활비를 쪼개어 갚아나가야만 한다. 결국 부채가 노후생활비를 잠식하게 된다.
여기에 줄어드는 인구로 인해 집값이 더 이상 오르지 않거나 떨어지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채무를 갚지 못하는 노인들의 파산이 잇따라 사회문제화할 가능성이 점쳐지기 때문이다. 요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주택시장은 길어야 2년 정도 오름세를 이어가다 2017년쯤 하락세로 기울 것이란 의견이 일부에서 제기된다.

최근 은퇴 파산으로 골치를 썩이고 있는 캐나다를 고령층 부채 문제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지난해 캐나다 파산관리국에 개인파산을 신청한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의 10%에 달해 지난 2010년보다 20.5% 증가했다. 또 어떤 형태든 부채를 갖고 있는캐나다의 65세 이상 노인층이 42.5%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돼 지난 1999년에 비해 55%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부채 털어야 은퇴 파산 모면
노인 부채 증가의 주범은 저금리로 지목됐다. 초저금리 상태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대출이 손쉬워지고 부채를 우습게 아는 풍조가 가속화해 빚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여기다 수명은 자꾸 늘어나는 데 부채 상환 부담에다가 질병 등의 이유로 목돈이 필요한 비상 상황까지 겹치게 될 경우 재정 사정이 급격히 악화돼 파산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부채 증가 원인이 우리와 빼닮았는 점에서 은퇴 파산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은퇴 파산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리 재정계획을 세워 가급적이면 부채를 털어 내고 은퇴생활로 넘어가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정부는 최근 가계부채 대책을 내놓으면서 내년부터 은행대출금의 거치기간을 줄이고 일시상환보단 원리금 분할상환 비중을 높여나가겠다고 발표했다. 금리가 앞으로 오를지 모르니 미리 대비하라는 정부 차원의 경고음이다.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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