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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일 정상회담이 남긴 과제

중앙일보

입력

지난 주말 열린 일본과의 정상회담은 난맥상에 놓인 북한 핵문제와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이야기해야 하는 시점에서 꼭 해야 할 행사였다. 21세기 들어 우리 국가원수의 첫 방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충일이라는 미묘한 시점에, 일본 집권 자민당 유력인사의 창씨개명 합리화 발언이 있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 참의원의 유사법제(전쟁대비법) 처리 직후에 진행된 이번 한.일 회담은 애당초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양국 국민의 환영과 기대 대신 섭섭함과 우려감 속에 열렸기에 그 효과가 반감되었다는 아쉬움이 있다.

***보통국가화를 우경화 매도 안돼

하지만 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동북아 안정을 위해 외교안보협력을 보다 구체화할 것이라는 의지도 재삼 확인했다.

또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의 가속화, 차세대를 염두에 둔 각계각층의 활발한 인적.문화적 교류 논의 등 한.일관계의 심화를 꾀하는 여러 조치에 합의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는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정부 차원에서는 실무적 합의를 추진하면서도, 시민사회 차원에서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원죄(原罪)'를 확인코자 하는 관례를 답습했다는 점이다. 미래를 과거의 굴레에 계속 묶어두고자 한다면 성숙하고도 건설적인 한.일 동반자 관계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우경화로 매도해선 안된다. 일본이 원하는 변화는 외부로부터의 안보위협을 이제는 스스로 막을 수 있는 권한과 태세를 갖추자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는 경제력에 걸맞은 정치력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일본이 핵무장을 거부하고 동북아시아를 독선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한, 일본의 안보역할 확대를 한국의 안보이익에 부합하도록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상호 군사투명성을 제고하는 가운데 가깝게는 북한 위협의 억지를, 멀게는 지역안정과 공동번영을 위해 협력을 다져가야 한다.

평화헌법의 족쇄를 풀지 못하고 자위대를 군대라 부르지 못한 채, 국내법 보완을 반복하며 헌법의 자의적 해석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우리가 아닌 일본의 딜레마인 것이다.

아울러, 과거사 문제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 국민이 집단적으로 보여온 무조건적인 일본 혐오 증세로부터 이제는 좀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가 일제시대의 위안부 동원을 국가 차원에서 인정하고 배상하려 하지 않는 것이나, 한국인들의 끊임없는 일본 사죄에 대한 갈증을 역으로 원망하는 심리상태나, 아니면 원폭 투하에 의한 피해자 의식은 반복해 주입하는 대신 전쟁책임과 관련한 가해자 의식에 소홀한 정규교육 과정 등 이러한 모든 뒤틀림은 한국의 문제가 아닌 역시 일본의 문제인 것이다.

독일 수준의 철저한 과거청산과 미래를 향한 환골탈태를 거부하는 일본의 '왜소함'은 한국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일본의 숙명이다.

역설적으로 일본이 지금의 국력에 성숙함을 동반한 지역 리더십까지 겸비했다고 한다면 우리에겐 한층 두려운 대국일 것이 아닌가? 한국이 힘과 실력을 키워 필요한 존재가 돼 있으면 역사는 저절로 제자리에 돌아올 일이다.

***집단적 일본 혐오증서 벗어나야

정상회담의 아쉬움을 하나 더 지적하자면, 한반도의 평화와 한.미관계를 좌우할 북한 핵문제에 대해 보다 긴밀하고 구체적인 협의를 폈어야 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한 단계 높은 대미공조를 바탕으로 북한에 대한 '추가적 조치'에 이미 돌입한 상태다.

한국은 무력충돌을 피해가는 북핵문제의 해결을 도모해야 하겠으나, 그러한 조심스러움이 지나쳐 한.미.일 공조 강화 노력에 게으르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더욱 곤란할 일이다.

정상회담이 남긴 한.일관계의 과제가 많다. 명분과 체면에 사로잡혀 한.일관계를 더 이상 과거의 틀에 묶어두지 말자. 이제는 보다 크게 보고 넓게 생각하여 양국관계를 리드해 나가도록 하자.
金泰孝,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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