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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문 다섯 번 썼다 찢은 17시간 협상 … 그렉시트는 면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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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운데)가 13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독민주당 회의에 참석해 당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이에 앞서 열린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그리스에 대한 3차 구제금융에 합의한 뒤 “명목적 채무 탕감은 없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AP=뉴시스]

19개 유로존 정상들이 17시간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그렉시트(Grexit·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위기를 넘겼다. 유로존 재무장관들의 회의(유로그룹)까지 포함할 경우 총 31시간이었다. 11~13일 그리스에 제3차 구제금융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벨기에 브뤼셀에서의 회의다.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13일 오전(현지시간) “만장일치로 합의를 이뤘다”며 “그리스에 유로존의 상설 구제금융 유럽재정안정화 기구(ESM) 지원을 위한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도 “합의 내용과 형식에 만족한다. 이제 그렉시트는 없다”고 말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그러나 “어려운 협상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걸린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격렬했다. 정상들끼리 낯을 붉히기도 했다. 회의가 끝난 후 “험악해진 관계를 어떻게 정상화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왔을 정도다. 특히 치프라스 총리를 두곤 EU 관리가 “물고문을 당하는 것 같다”고 얘기할 정도로 이어졌다.

 갈등이 본격화한 건 12일 낮 유로그룹이 유로존 정상회의에 넘긴 협상안이 공개되면서다. 전 세계 트위터를 통해 ‘이건 쿠데타’(#ThisIsACoup)란 반발을 부를 정도로 가혹한 내용이었다.

 그리스 의회가 15일까지 연금·세법·민영화 등 개혁 입법을 통과시켜야만 구제금융 협상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치프라스 정부가 올 초 집권하면서 도입했던 반 긴축 조치도 무효화해야 했다. 이들 개혁 조치를 이행하지 않으면 그리스를 유로존으로부터 최소 5년간 탈퇴할 수 있도록 했다. 한시적 그렉시트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일련의 개혁 과정을 점검하도록 했다. 또 그리스 은행 정상화와 부채 상환을 위해 그리스 국내총생산(GDP)의 27% 수준인 500억 유로(약 62조6600억원)의 그리스 국유재산을 룩셈부르크 펀드로 이관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이 펀드는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이 관장하는 독일개발은행 휘하에 두도록 했다.

 진보 언론에선 “독일이 치프라스에게 보복했다”(가디언), “독일, 무슨 장난을 치느냐”(리베라시옹)고 했다. 영국 BBC방송도 “유로그룹 제안대로 된다면 그리스로선 경제적 주권을 사실상 빼앗기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런 만큼 12일 오후 4시부터 열린 유로존 정상회의에선 격론이 오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회의 전 “가장 중요한 통화를 잃었다. 그건 바로 신뢰”라고 말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그리스는 유로존에 잔류하거나 탈퇴한다”면서 한시적 그렉시트는 배제했다. 두 정상은 수시로 충돌했다. 그 사이 다섯 차례 이상 합의안이 작성됐다 폐기되곤 했다.

 결국 정상회의가 시작된 지 17시간 만에 합의문이 나왔다. 합의문에는 한시적 그렉시트 항목을 뺐다. 또 그리스 국유재산 펀드도 룩셈부르크가 아닌 아테네에 두도록 했다. 만기를 연장하는 방식으로 부채를 경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나머지는 대부분 그대로 살아남았다. 그리스 국민의 저항감이 큰 IMF의 감시도 계속 받게 됐다. 그리스로선 삼키기 힘든 처방을 받아 든 셈이다. 올랑드 대통령은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선 이 길밖에 없다”고 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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