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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총리는 대통령의 ‘얼굴 마담’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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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 이어 최근의 메르스 사태에서 드러난 행정의 난맥상과 사회 전반의 도덕적 해이, 공인의식의 퇴화, 그리고 국회법 파동으로 인한 대통령과 여당 원내대표 사이의 갈등은 국가 통치체계 전반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제도적 원인으로 ‘87년 체제’의 피로현상이 거론되면서 일부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내각책임제나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 여론도 일고 있다.

 물론 개헌은 논의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정치권이 헌법 준수에 투철했으며, 국정혼란의 원인이 과연 현행 헌법의 권력구조에 있는지 여부부터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국정혼란의 주범이 과연 대통령인지 국회인지, ‘제왕적’인 존재가 전자인지 후자인지 여부도 반성의 대상이다. 그렇지 않은 개헌 논의란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자 새로운 정치적 혼란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다.

 무엇보다 개헌 논의의 주요 대상이자 ‘얼굴 마담’ 같이 오랫동안 비속한 풍자의 대상이었던 국무총리 제도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국무총리 제도가 헌법 조항에 합당하게 제대로 운영됐는지 말이다. 이런 논의는 대통령이 흔들리고 있고 국정의 통할 기능이 실종된 작금의 현실에서 더욱 절실하다. 새 총리가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해 빠른 시일 내 국정이 정상궤도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총리의 역할에 관해 헌법 86조 2항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비록 구체적인 역할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지극히 포괄적인 규정이지만 그것이 총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 근거는 결코 되지 않는다. 헌법이라는 최고 규범은 필연적으로 당위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총리에게는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고 행정각부를 ‘철저히’ 통할해야 할 역할과 의무가 부여돼 있다. 총리가 그와 같은 역할과 의무를 ‘제대로’ ‘철저히’ 수행하지 못하거나 그러한 수행을 저해하는 행위는 반(反)헌법적이다. 누구보다 대통령이 그러한 헌법정신에 투철해야 한다. 그와 같은 헌법정신에 입각해 총리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대통령의 효율적인 국정 수행을 위해서나 국가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어느 조직에서도 조직의 수장이 수행해야 할 역할과 그를 보좌하는 참모들을 통할하는 참모장의 역할은 구분돼 있다. 조직의 수장은 조직의 존재 이유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직의 내적·외적 환경의 변화를 미리 포착하면서 조직목표를 새롭게 설정할 줄 알아야 한다. 또 새로운 혁신이나 기획을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 참모장은 그러한 구상을 실현해내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게 임무다. 이와 함께 여러 다른 성격의 하부 조직이 원활하게 운영되는지, 조직의 수장이 지시한 기획이 효율적으로 실현되고 있는지 세밀하게 점검하고 독려해야 한다. 아울러 정보를 제공하고 조언을 통해 수장의 판단과 결정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에게는 국가의 이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기초로 국정의 근본 문제를 파악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창조적인 과업이 부여돼 있다. 그러한 과업의 수행 자체가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구한다. 깊은 사색과 폭넓은 독서, 사회 각계각층 인물들과의 진솔한 대화가 필수적이다. 공자(孔子)를 비롯한 동서양의 위대한 정치철학자들은 통치자가 바로 그러한 과업의 어려움을 제대로 아는 것이 흥국(興國)의 요체임을 갈파한 바 있다. 세종대왕을 비롯한 위대한 통치자들의 공통적인 자질도 마찬가지다. 인물을 알아보고 믿고 맡기면서 통치자 스스로도 교과서적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는 사색과 독서, 대화를 통해 국가적 문제를 새롭게 파악하려고 노력한 점이다.

 현재의 대통령에게는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깊이 검토하고 해결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동북아 지역 안보환경의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출산율 하락, 공교육의 황폐화 등 국가 흥망과 관련돼 있는 난제가 차고 넘친다. 대통령은 그러한 문제에 집중하면서 행정부의 통할은 총리에게 위임해야 한다. 정보 보고를 통해 국정 전반의 실태 및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그 통할의 방향이나 성격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경우에만 국정에 직접 개입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이 혼동되면 총리는 ‘얼굴 마담’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런 반헌법적인 상황이 지속되면 국정은 방향 감각을 잃고 표류하기 십상이다.

 결국 개헌 논의 이전에 현행 헌법이 철저히 지켜지지 못한다는 사실이 국정혼란의 근원이다. 봉건 독일의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룩한 프러시아의 황제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 밑에서는 황제 노릇 하기도 쉽지 않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가 권력을 휘두를 줄 몰라 국정의 대부분을 비스마르크에게 일임한 것은 아니다. 그 황제의 인물됨에 부응하듯 그 명(名)총리는 자신의 묘비를 다음의 문구로 장식했다. ‘황제 빌헬름 1세의 충직한 신하’.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