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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패션 디자이너 헨리 빕스코브…객석의 의표 찌르는 오감만족 무대

중앙일보

입력

196cm의 큰 키에 중절모까지 눌러쓰고 노랑 ‘땡땡이’ 양말을 신고 나타난 덴마크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헨릭 빕스코브(43). 마흔을 넘겼지만 “내가 디자인한 바지인데 남들보다 큰 키 때문에 크롭 팬츠가 됐다”며 웃는 모습이 소년 같다. 런던에 있는 세인트 센트럴 마틴 예술디자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2년 만에 파리컬렉션에 데뷔해 북유럽 패션계의 기대주로 떠오른 그는 전자밴드의 드러머이자 설치예술가이기도 하다. 패션과 현대 예술의 경계를 오가며 ‘충격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패션쇼 무대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그가 7일 한국을 찾았다. 12월 31일까지 서울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자신의 전시회 ‘헨릭 빕스코브-패션과 예술, 경계를 허무는 아티스트’전을 직접 소개하기 위해서다.

현란한 조명과 형형색색의 옷, 귀청을 때리는 음악이 함께하는 패션쇼 무대는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종합예술이다. 하지만 이런 패션쇼도 인간의 오감을 모두 만족시키기엔 부족함이 있다. 미각과 후각이 빠지기 때문이다.

빕스코브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민트에 대한 탐구’라는 제목으로 2008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선보인 그의 패션쇼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독특한 무대로 화제를 모았다. 런웨이 무대를 따라 천장과 바닥에 싱그러운 민트색 풍선 기둥들이 들어서고, 그 사이로 민트색 가발을 쓴 모델들이 등장할 때마다 무대에선 바람이 ‘훅’ 일었다. 그 바람결을 따라 진한 민트향이 퍼졌다. 쇼가 끝난 직후에는 초대 손님들에게 보드카와 우유, 민트 크림을 섞은 음료를 제공했다. 쇼 장을 채운 음악 역시 ‘민트 느낌이 나는’ 곡이었다.

오감만족 무대 연출로 전 세계 이목을 사로잡다

헨릭 빕스코브는 패션디자이너이면서 전자음악 밴드의 드러머이고, 동시에 뉴욕 현대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다수의 전시를 개최한 아티스트다. 최근에는 아이슬란드의 싱어송라이터인 비요크의 오페라 무대 의상,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의 메인 의상도 디자인했다.

신은 왜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능력을 주었을까. 정작 본인은 모든 게 ‘우연’이라고 말한다. 고 알렉산더 맥퀸을 비롯한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한 세인트 센트럴 마틴에 들어가 남성복 디자인을 전공하게 된 계기도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따라가기 위한 가장 쿨한 방법이었다”고 했다.

우연히 시작한 패션 디자인이었지만 그는 곧 놀라운 두각을 나타냈다. 졸업 작품전이 덴마크 국영방송에 중계됐고, 2년 후인 2003년에는 파리 컬렉션에 데뷔해 북유럽 패션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실제로 빕스코브의 무대는 늘 관객의 기대를 넘어섰다. 그의 쇼는 독창적인 개성과 획기적인 퍼포먼스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2007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빅 웨트 샤이니 부비스(the Big Wet Shiny Boobies)’는 전 세계 이목을 단숨에 불러 모은 충격적인 무대로 꼽힌다.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한 소재로 만든 여성의 가슴 모양을 막대에 꽂아 무대를 빽빽하게 채우고 그 사이사이에 모델을 눕게 했다. 모델이 캣워크를 하는 게 아니라, 관람객이 무대 주변을 돌며 마네킹처럼 누워 있는 모델을 관찰하는 형식이었다. 만화 속 말풍선처럼 생긴 비현실적인 가슴 모양 조형물 설치도 파격적이었다.

빕스코브는 이 엄청난 무대가 “드레스 셔츠 장식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위트 있는 디자인을 즐기는 빕스코브는 당시 드레스 셔츠에 크고 입체적인 가슴장식을 붙이는 것을 구상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요즘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이 굉장히 장난스럽고 짓궂게 변하더군요. 이거 재밌는데. 가슴은 어머니의 품을 연상시키는 고향 같은 이미지면서 동시에 남자들의 모든 꿈이니까요. 아예 가슴 조형물을 잔뜩 만들어서 무대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볼까 했죠.”

실제 런웨이를 그대로 옮겨놓은 전시장

대림미술관 전시장은 빕스코브의 대표적인 패션 쇼 무대를 그대로 재현한 듯 했다. 2층 입구에서 만나는 검은 줄들은 2013 가을겨울 패션쇼 무대를 장식했던 조형물이다. 부리가 붉은 플라밍고 새의 목을 바닥을 향해 거꾸로 길게 늘어뜨린 것이다. 천장에 닿는 부분은 스커트를 펼친 듯 설치했다. 색색의 연을 하늘로 띄워 죽은 이와 소통하는 과테말라 풍습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당시 쇼 무대도 똑같이 구성됐다. 고개를 떨군 새는 섬뜩하지만, 하늘을 향해 활짝 펼쳐진 연 모양은 경쾌해보였다. 초록색 연못과 붉은 플라밍고 새를 그린 프린트 의상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는 만화 같은 생동감마저 돌았다.

3층에는 최근 막을 내린 2016 봄여름 컬렉션 무대가 재현됐다. 제목은 ‘핫 스프레이 이스케이프(the Hot Spray Escape)’. 오늘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당시 무대에는 마른 사막에서의 생존을 연상시키는 텐트들이 설치됐다. 전시장 역시 한쪽 벽면을 요란한 무늬의 텐트들이 채우고 있다. 실제 패션쇼에선 이 텐트 끝에 근육질의 보디빌더를 연결해 그들이 텐트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전시장 다른 공간은 ‘문제의’ 그 가슴 조형물이 채우고 있다.

4층은 ‘민트에 관한 탐구’ 섹션으로 꾸몄다. 텅 빈 방 안 천장과 벽엔 민트색 풍선이 불룩불룩 설치됐고, 풍선에 바람이 채워질 때마다 하얀 연기와 함께 민트향이 실내를 채운다.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선 당시 무대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이 밖에도 신체와 섬유에 관심이 많은 아티스트답게 나무관절 인형, 비누방울을 투영해 형태를 왜곡시킨 나체사진, 울 뭉치로 만든 얼굴 등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옷, 내가 좋아하는 패션쇼

전시장 곳곳에는 빕스코브의 의상들도 전시됐다. 첫눈에 ‘이걸 어떻게 입어’ 소리가 절로 날 만한 옷들도 보였다. 거인의 우주복 마냥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점프 수트가 있는가 하면, 과도한 크기의 도트무늬와 엠보싱 처리가 부담스러운 옷도 있다. 빕스코브의 아티스트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공수된 것들이라 그렇다.

그의 실제 컬렉션 옷들은 어렵지 않다. 일상을 접목한 위트가 곳곳에서 엿보여 당장이라도 걸쳐 입고 거리에 나서도 무방해 보인다. 색색의 줄무늬와 낙서 같은 그래픽 프린트를 즐기는 빕스코브는 “시즌 프로젝트에 따라 그때그때 콘셉트는 달라지지만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입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런 생각으로 옷을 만든다”고 했다.

설치예술이 가미된 패션쇼 무대는 매번 너무 충격적이라 웬만큼 센 디자인의 옷이 아니면 자칫 묻힐 수 있다. 이 질문에 빕스코브는 “밸런스가 맞으면 좋겠지만 일단 내가 좋아하는 패션쇼인지가 우선”이라며 “관객들에게 신선한 경험과 비전을 줄 수 있는 패션쇼가 될 수 있다면 누군가의 평가에 대해선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이어 그는 “한국의 관람객이 2층의 부비 컬렉션만 기억하기보다(웃음), 빕스코브라는 사람의 세계관을 함께 경험하고 좋은 느낌을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남겼다.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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